감상문 다양성과 통일성의 문화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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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감상문 다양성과 통일성의 문화의 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사실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사의 이해라는 수업을 통해 한국사에 대해 생각해보고 배우기 위해 수강하였다. 역시나, 이런 저런 책들을 참고로 하여 수업을 해 주셔서 평소에 읽지 못한 분야의 책들도 요새 많이 읽게된다. 그 중에 하나가 ‘500년 고려사’가 된것같다. 아직은 ‘다양성과 통일성의 문화의 사상’ 부분밖에 읽지 못했지만,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빌려 모든 부분을 읽어볼 생각이다.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고려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오히려 고려의 역사적 사실보다 고려의 문화로 먼저 고려를 접하게 되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이 책의 핵심 부분을 요약해서 말해 보겠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고려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앞에서도 줄곧 말했듯이 다양성과 통일성으로 야기된다. 즉, 다양한 공간에서 형성된 문화유형이 문화적 다양성이 혼재되어 혼돈과 무질서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다양한 개성미가 하나로 어우러져 고도의 통일성을 지나고 있는 것 이다.
또한, 우리는 대게 고려의 문화를 생각하면 고려청자나 팔만대장경 따위만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이런것들은 중앙문화에 속한다. 이 책에서 이 의미를 예를들어 설명한 것을 인용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문화라하면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을 떠올리는데 이것은 주로 서울에 사는 중류층 이상 사람들이 향유하는 것이라고 볼수있다고 했다. 즉, 중앙문화는 특정 엘리트 계층이 일반층과 다른 취향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함이였다.
또한, 중앙문화는 양보단 질을 추구한다. 그에비해 지방문화는 지방세력과 지방민들의 문화로서, 질보단 양을 추구하며 거대함과 투박함과 역동성을 나타내곤 한다.
물론 나중에 조선시대에는 사족층이 당시 사회를 주도하면서 유교문화라는 단일한 문화를 꽃 피우게 된다. 그로인해, 지역간의 발전 격차도 크게 해소되기도 한다.
팔만대장경은 고려문화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유물이다. 통일성은 다양한 문화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곤한다. 팔만대장경은 문화강국 고려국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팔만대장경 조성사업은 모든 계층이 참여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아오가 지방문화를 하나로 묶어 통일성을 추구한 고려문화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문화사업이기도 하다.
고려에서는 불교가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불교행사를 국가적 행사로 장려한다. 불교행사에는 연등회와 팔관회등이 있는데, 연등회는 전형적인 국가 불교행사일 뿐만아니라, 농경사회의 춘경제의식이기도 하다. 팔관회는 매년 11월에 열렸으며, 토속신앙과 복합된 일종의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지는 국가적 행사였다. 또 고려시대 불교사상은 고려 전기에는 선종, 화엄종, 법상종의 3대 종단으로 중기에는 천태종이 추가된 4대 종단을 중심으로 불교사상이 전개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불교계는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지나치게 정치권력에 의존하게되어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사상계의 주도권은 성리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여러 신앙활동이 있었는데, 향도신앙과 성황신앙 외에도 무속신앙이 존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이런 신앙활동이 모두 금지되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신앙행위가 지방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곤 했다. 하지만 12세기 이후 유교가 확산되면서 이런 신앙행위를 없애려 하지만, 고려정부는 이를 아예 폐지하거나 방치하지 않고 국가질서 속에 수렴하는 정책을 취한다.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통일성으로 묶는 가장 상징적인 제의 형태가 아까 말한 팔관회이다.
또 우리나라에 수용된 외래문화중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예로 고려 말에 수용된 성리학을 들수 있다. 당시 성리학은 원나라로부터 수용된다. 성리학은 치자층, 즉 지배층의 수양과 수신을 강조한다. 그 말은 성리학은 치자층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은 고려 말 개혁을 택인재와 복과전의 방안으로 이끌었다. 택인재는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가진 올바른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고 복과전은 전제를 개혁하여 새로운 토지제도 즉 과전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3~4명의 자녀를 둔 단혼 소가족 형태였다. 요즘으로 치면 핵가족이나 마찬가지 이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평균 자녀 수는 5~6명으로 고려시대보다 약간 규모도 컸으며, 한 가족 내에서 4세대 혹은 3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형태가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남자가 혼인 후 낳은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여자의 집에서 거주하게 된다. 이런 혼인 형태는 여자가 경제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고려시대 가족 형태나 규모는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단혼 소가족 형태인 것이다.
이쯤에서 어떻게 여자가 경제적 기반을 가질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남녀 균분 상속이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상속 형태가 남녀균분 상속으로 여자도 재산을 상속받아 남자가 여자집으로 와서 거주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여성이 호주로 기록되기도 했다. 즉 여성이 재산상속, 호주, 제사의 주체가 될수 있었다.
고려사회는 ‘다이관지’의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고려사회는 다양한 사회구조, 사상, 문화가 녹아 하나로 통이뢷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회, 여러 가지 원리와 기준을 갖고 이해해야 본직을 꿰뚫을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다양성과 통일성을 특성으로 하는 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