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시 지역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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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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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Ⅰ. 서론 (지역조사의 필요성) - 그 지역에 있는 사회문제에 대해 즉, 사회복지에 대한 문제가 있어 해결을 하려면 그 시에 대해 정확한 특성과 정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클라이언트와의 소통과 올바른 라포 형성을 위해서도 그 지역적 특성을 파악해 놓는 것이 중요한데 그 지역의 주민의식은 물론, 생활실태, 문화를 알아야 하는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복지사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과천시에 대해 과거는 어떠했는가와 현재 실태는 어떤지, 각각 동별 특성으로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 과천시의 특성
1. 과천시의 유래 및 연혁 과천시청 홈페이지
▶ 삼국시대
삼국시대엔 고을과 고을 사이의 땅 경계가 오늘날과 같이 뚜렷하지 않았다. 어느 고을(郡縣)이라고 하면 읍내(邑內)와 같은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진산(鎭山)의 산줄기를 따라 이루어지는 일정 지역이 대략 그 영역이 되는 것이 일반이었다.
따라서 동사힐 또는 율 목(栗木)으로 불렸던 고구려 시대의 과천(果川) 영역이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정확히 짚어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라 경덕왕 때(757) 율목군을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율진군이었던 곳이 그 영역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될 뿐이다.
▶ 통일신라시대
고구려 땅이었던 과천은 신라가 문무왕 이후 한반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그 관할 안에 들어가게 됐다. 『삼국사기』 권 35에 보면 율진군(栗津郡)은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을 경덕왕이 개명한 것인데 (『삼국사기』가 간행된 고려시대에는) 과주(果州)라 부른다 고 기록되어 있고, 거기에 속한 영현이 곡양현(穀壤縣), 공암현(孔巖縣), 소성현(邵城縣) 등 셋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의 과천(果川:栗津郡)은 상당히 큰 영역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곡양(穀壤)은 현 서울특별시 구역중 구로구의 가리봉동, 구로동, 독산동, 시 흥동, 신도림동과 관악구의 봉천동, 신림동, 동작구의 상도동, 대방동, 신대방동, 영등포구의 당산동, 대림동 도림동, 문래동, 신길동, 양평동, 양화동, 그리고 경기도의 광명시(옥길동 제외)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이것만으로도 무척 넓은 지역이다. 공암(孔巖)은 지금 의 서울 강서, 양천구 일원이며, 소성(邵城)은 인천시와 부천시 일부및 시흥시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당시 율진군(栗津郡)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군으로는 남쪽으로 수성군(水城郡:지금의 수원시), 당은군(唐恩郡:지금의 화성군)이 있었고, 북쪽으로 한양군(漢陽郡: 지금의 서울, 광주, 양주, 고양)이 있었다. 또 동쪽으로는 소천군(?j川郡:지금의 광주, 여주)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안산군(安山郡:지금의 안산시, 시흥시 일부)과 장제군(長堤郡:지금의 부평, 김포)이 있었다. 이러한 지역 분포로써 당시 율진군(栗津郡)의 영역도를 그려 보 게 된다면, 북쪽은 한강, 남쪽은 수원과의 경계, 동쪽은 광주와의 경계, 서쪽은 안산까지 이르게 되는 넓은 지역이 된다.
▶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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