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전선 주창 진보적 민족주의자 김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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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통일전선 주창 진보적 민족주의자 김성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국광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사상과 지조로써 살고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 선생이시다. 1898년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기미년에 옥고를 치른 뒤 사회운동에 가담했다가 마침내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산대학정치학과를 미치고 베이징, 광둥, 상하이 등지에서 혁명단체의 기관지들을 편집했으며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조선민족해방 동맹을 조직하기도 하고 뒤에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여러 혁명단체들을 통합,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가 다시 모든 단체들을 임시정부로 총단결하여 국무위원이 되어 해방을 만나니 48세였다.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갖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는 추호도 굽힘없이 살다가 1969년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지냈다.”(김성숙의 ‘묘비문’)
26살에 중국으로 망명
님 웨일즈가 쓴 한 항일운동가(김산·본명 장지락)의 전기인 이 국내에 번역·소개되면서 본명보다는‘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김충창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
그의 묘비문에서도 읽을 수 있듯 그는 일제 때는 멀리 중국땅에서, 해방 뒤에는 분단된 조국의 한 모퉁이에서 항일투쟁·좌우합작·혁신운동을 위해 파란만장한 사람을 살다가 혁신계 인사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가난과 병고 속에 생을 마감했다. 좌우합작의 시대였던 40년대 들어 좌파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그는 임정 내무차관과 국무위원을 역임했으면서도 좌파 출신의 혁신계 인사라하여 임정의 법통을 내세우는 광복조국으로부터는 감시와 탄압만 받았을 뿐 살아서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또 숱한 인물들이 받은 건국공로 훈장도 광복 37년 후,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1982년에야 주어졌다.
구한말 격동기인 1898년 3월 10일 평북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아들로 태어나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본격적으로 혁명운동과 독립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김성숙의 일생은 △18세에 승려가 되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진보적 사상을 닦은 시기 △1923년 망명 이후 43년 임시정부에 참여하기까지의 혁명운동과 문필활동 시기 △임정 참여를 전후해서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민족통일전선운동 시기 △전쟁 이후의 이승만정권에서부터 5·16쿠데타를 맞기까지의 혁신운동 시기 △이후 정권교체를 위해 보수야당에 참여해 생을 마치기까지 시기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활동공간과 성격에 따라 이런 구분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사상적 바탕은 통일된 자주독립조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였다. 특히 좌우합작 운동의 일환으로 임서정부에 참여한 이후 그는 그 방법이 좌우파 민족주의자들 합작을 위한 연합전선이라는 믿음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또 일제 때는 중국에서 해방공간에서 좌파에 가담했으면서도 한번도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김성숙은 10살 때인 1908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고향에 세워진 대한독립학교에 들어갔으나 2년 뒤 한일합방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할아버지가 차린 글방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그러던 그는 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 등에 관한 소문을 듣고 쑨원과 레닌 등 혁명가들에게 빠져 있던 무렵 때마침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잠시 고향에 들른 집안 아저씨가 들려준 독립군의 활동상을 듣고 만주망명을 결심했다.
18세 때인 1916년 봄 만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쳐 국경을 넘지 못하게 되자 그는 곧바로 경가도 양평의 용문사로 들어가 중이 됐다.
용문사에서 2년 반쯤 승려생활을 한 그는 경기도 양주군 광릉의 봉선사로 옮겨 정식으로 불경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비로소 독립운동에 투신하려 했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봉선사의 노승 월초 밑에 있으면서 월초와 절친하게 지내던 손병희, 김법린, 한용운 등 3·1운동의 중심인물들을 만나고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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