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 세력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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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익 세력의 재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주 제 : 우 익 세 력 의 재 편
Ⅰ 우익세력재편과정의 대략적 서술
― 우익인사의 재편 ―
일제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지주소작 관계에 바탕을 둔 봉건적 생산구조와 사회관계를 유지 확대시켜 식민지 사회구조의 모순을 심화시켰다. 이에 따라 1945년 말 당시 전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 중에서 1정보도 안되는 토지를 소유한 영세농민들이 70%를 넘었고, 1945년 직후 일본노동자의 반도 안되는 노임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의 수가 212만 명을 초과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의 이런 상황 속에서 토지개혁과 일제잔재의 청산 요구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끊임없이 민족해방투쟁의 선두에서 활동해온 공산주의자들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동맹세력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8월말 전국에 인민위원회 145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반면에 대부분의 친일파나 지주, 자본가들은 일제와 협력해온 경력으로 인하여 민중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군이 진주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변화하였다. 미국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의 어딘가에 사회주의 체제 또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미국은 먼저 국내의 정치세력들을 재편하려고 하였다. 그 재편의 방향은 좌익을 배제하면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보수우익의 세력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1946년 2월 우익연합인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결성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미군정은 경찰조직을 확대 개편해 좌익세력을 탄압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는 당시 군대조직보다 경찰조직이 더 컸던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한편 좌익계에서도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하였고 결국 좌우익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열되고 말았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좌우합작운동은 유명무실해졌고 또한 1946년 초부터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우파민족주의자들(김규식, 안재홍 등의 세력)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이들은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추진되었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 수립 후 반독재 민주세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해방 후 우익이 어떻게 자신들의 세력들을 편성하고 재편해 나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일반적으로 우익세력이라 함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과 같이 대표적인 친일파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 반탁노선에 동조했지만 이승만 세력의 단정노선에는 강력히 반대를 했던 김구 및 한독당 세력 등이 있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그가 그렇게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이유는 첫째로 인공에서 이승만을 주석으로 지명할 정도로 대중적인 명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는 1944년부터 전략사무국(OSS : 중앙정보부 CIA의 전신)에서 근무하였다. 셋째로 그는 당시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던 맥아더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선택을 받은 그는 우익 내부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고(민주의원) 경찰력의 뒷받침을 받았으며(장택상과 조병옥) 재정적인 지원까지 받았다(한미간의 무역에서 생긴 돈을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런 미군정의 지원 속에서 그는 ‘독립촉성국민회’의 확대를 통해 자신의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은 1945년 9월 16일 중경임시정부 지지와 인민공화국 타도를 선언하며 창당되었다. 처음에는 진보적 양심세력 등 다양한 세력들이 참여했지만 그 본질상 대부분이 친일파지주, 자본가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기회주의적이었다. 이는 임정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처음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했지만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공식적인 정부로 승인하지 않자 그 태도를 180도 바꾼 것이다. 한민당은 미군정과 밀착하여 군정청의 요직과 검찰, 경찰을 장악하여 중도 및 좌익세력의 탄압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들은 친일파 처단이라든가 토지개혁 등의 문제에 대해서 시종일관 반대했다. 한민당은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이승만 노선을 지지했는데 이는 이승만이 미군정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점과 자체적인 문제(친일파) 때문에 독자적으로 정치적인 신망을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940년 다시 창건된 한독당은 1945년 11월 23일 환국 후 임정법통론을 내세워 임시정부의 이름을 활동했다. 하지만 한독당은 그 자체내로 어떤 뚜렷한 통일된 정치노선이 없었다. 이는 김성숙, 장건상 등 좌익계의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민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 말 이후로 반탁운동을 고집하면서 한독당 및 임정계열 내부의 김규식, 김원봉, 성주식 등의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떨어져났다는데서 드러난다. 또 한독당은 임정법통론만을 내세워 이들의 정치 노선에서 연합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인민공화국과 합치는 것을 거부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후 표면적으로 한독당을 대표했던 김구는 단정수립 전까지 이승만과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반탁운동을 하였으나 그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기본적으로 중도파의 통일구상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김규식의 정치노선(민주의원의 부의원으로 있을 때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참여를 촉구한 성명, 좌우합작위원회 활동, 민족자주연맹 결성, 남북연석회의 참석 등 통일전선적 노선)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바로 1947년에 결성된 민족자주연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체는 그 동안 좌우익이 아닌 독자적인 제3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중도파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순수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단정수립을 용납할 수 없었고 오직 민족의 분열을 막고자 하는 입장에서 결집하였던 것이다. 김규식의 또 하나의 정치노선은 대미협조노선이다. 그는 당시의 국제적 상황 파악하에 미국과의 협조 없이는 민족통일국가 수립이 어렵다는 점을 인식했던 것이다. 이는 한민당의 노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이 단정수립 쪽으로 가자 즉시 미국과의 협조노선을 철회하였다.
Ⅱ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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