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전선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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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서 민족의 분산된 독립운동 역량을 한 곳으로 결집하기 위한 활동은 해방을 맞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한국 독립운동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이러한 활동을 민족통일전선운동 또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좌우익 통일전선이 불가피했던 근본적인 요인은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이 부진하여, 유럽식 개념으로 보자면 민족부르즈와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민족부르즈와지의 성장이 미약하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도 미약한 민족사회가 식민지로 전락할 경우, 그 민족해방운동은 결국 민족부르즈와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전선에 의해 추진될 수밖에 없다.
일제시기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에서 제기된 좌우합작론은 민족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담론이었다. 민족과 계급이라는 양대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우리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은 근대적 전환을 이루게 된 것이다.
통일전선운동의 배경
강력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는 문제는 독립운동의 출발과 더불어 제기되었다.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된 ‘대동단결선언’(1917)이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었으나 호응이 없어 실패하였다. 민족의 대동단결은 31운동을 통해 실현되었다. 31운동이 확산되면서 복벽주의 노선에서 공화주의 노선으로 정치적 목표도 합의를 이루어 갔고, 종교신분계급을 달리하는 세력들과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다양한 노선들이 합류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동단결의 상징이자 구현체로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으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방략과 위임통치론에 대한 논란으로 임시정부가 본연의 임무와 역할을 수행해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민족 구심체로서의 의미도 훼손되었다. 이러한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국내외 독립운동자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와 방략을 모색하자는 국민대표회의(1923)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개조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기구를 조직하자는 ‘창조파’의 대립으로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독립운동전선이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각자 이념과 노선에 따라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분열대립하게 된 상황에서 좌우세력들은 모두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적 대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요성에 공감하였다. 이로써 1920년대 중반부터 독립운동전선에서는 좌우세력을 중심으로 통일전선을 이루려는 노력들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그 배경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세력의 일부가 일본의 민족분열정책에 말려들어 타협주의 노선으로 선회하는 한편, ㉡당초 좌우익 통일전선의 성격으로 성립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이 국민대표회 실패 이후 침체하면서 전체 독립운동전선이 분산되어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내외 운동전선에 사회주의운동이 확대되고 발전하면서 전선의 분열상이 뚜렷해졌으며, ㉣1920년에 개최된 코민테른 제 2차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력이 약한 동안은 민족부르즈와세력과 제휴하여 제국주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는 「식민지 민족문제에 관한 테제」가 발표되었고, ㉤그 테제에 의거하여 1924년부터 27년까지 중국에서 국공합작을 실현한 선례가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 형태와 방법은 시기와 독립운동의 객관적 변화에 따라 다르게 추진되었다. 1920년대에는 민족유일당운동으로, 1930년대에는 독립운동정당을 중심으로 민족단일당을 결성하려는 것으로, 1940년대에는 임시정부로 세력을 결집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 : 유일당운동과 신간회
1) 중국 관내지역의 유일당운동
중국 관내지역은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으로, 이념과 노선을 달리하는 다양한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세력과 불신임하는 세력, 그리고 임시정부와 고려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우익 진영이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며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들 사이에 통일전선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형태는 민족적 대당체로서 유일한 정당체를 조직하려는 유일당운동으로 추진됐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해체론이 대두된 이후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세력들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개헌을 단행하는 등 자체적으로 임시정부를 수습해 가는 한편, 임시정부를 유지해 가려는 방안으로 민족대당체의 조직을 촉구하였다. 안창호는 민족대당의 결성을 선도하고 나섰으며 북경에서 좌파세력의 대표인 원세훈과 만나 대독립당 결성방안에 합의를 이루었다. 그 방법은 우선 각지에 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일하여 민족유일당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합의하에 임시정부 중심의 우파세력과 북경지역의 좌파세력을 중심으로 대독립당북경촉성회가 결성되었다(1926. 10). 이를 계기로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운동은 곧 상해남경무한광동 등지로 번져 유일당의 전 단계인 촉성회가 조직되어 갔고, 그 대표자들은 상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개최했다(1927.11).
그러나 유일당운동은 5개 지역 촉성회가 연합회를 결성한 단계에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우파세력들은 유일당을 조직하여 이를 기초로 임시정부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좌파세력들은 유일당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이를 혁명정당으로 발전시킨다는, 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의도와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세력과의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로 민족유일당의 통일된 형태와 지도노선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이 무너졌고(1927), 1928년 코민테른이 ‘12월테제’를 통해 좌파세력에게 민족부르즈와세력과의 결별을 요구한 것도 실패의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 좌파세력의 노선전환이 있어, 민족주의보다 국제주의 노선에 경도되어 가던 ML계는 결합에서 분리로 전술방침을 전환하고 그 주도하에 상해촉성회를 해체함과 동시에 좌파세력의 결집체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라는 별도의 단체를 결성하였다(1929. 10). 이후 우익세력도 임시정부의 옹호유지를 목적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1930. 1). 이로써 1920년대 중반부터 추진된 중국 관내지역의 유일당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2) 만주지역의 유일당운동과 3부통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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