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문제점

 1  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문제점-1
 2  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문제점-2
 3  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문제점-3
 4  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문제점-4
 5  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문제점-5
 6  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문제점-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북한의 통일정책과 그 문제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반도 혁명전략(혁명노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북한의 통일정책은 그 혁명노선에 따라 달리 규정되어 왔다. 북한은 남한혁멱을 1955녀 4월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멱`으로,1961년 제 4차 당대회에서는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으로, 기르고 1970년 제 5차 당대회에서느느 최종적으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NLPDR)으로 정식화하였다. 여기에는 남한이 `미제국주의`의식민지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한반도 혁명과 통일에서 미국을 주요한 적으로, 남한의 지배세력을 미제와 결탁한 `반동`세력으로 규정하여 참된 통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겨왔다. 이것은 남한의 `미`로부터 해
방이 되면 한반도는 저절로 통일이 된다는 논리다. 북한의 혁명노선은 민주기지론(혁명기지론)과 지역혁명론에 뿌리를 두고 변화해 왔다. 민주기지론은1945년 해방뒤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적용되어온 노선으로 그 뒤에는 지역혁명으로서의 남한혁명론과함께 적용되어왔다. 민주기지론은 해방 뒤 소련군이 진주한 조건을 이용하여 북한의 정치, 경제, 군사역량을 강화하여 아직 해방되지 못한 남한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당연히 북한의 혁명역량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자신들은 사회주의혁명을 계속 진행시키는 데 견주어남한에는 아직 반제반봉건의 과제가 남아 있어 남북한 사이에 혁명의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상대적으로 남한혁명의 독자성을 고려하여 지역혁명론을 내세웠다. 1964년 당 중앙위원회 4기 8차 전원회의에서는 조국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조선 혁명역량`,`남조선 혁명역량`,`국제 혁명역량`등 3대 혁명역량의 강화를 표명함으로써, 남한혁명에 지역혁명으로서의 독자성이 부여되었지만, 여전히 북한의 혁명역량이 강조되었다.
북한은 이러한 혁명론을 바탕으로 통일에 접근해 가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방안으로 설정하였다. 하나는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평화적 전도)이며, 다른 하나는 큰 전쟁으로 제국주의 세력이 약화되는 조건에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비평화적 전도)이다. 북한이 말하는 통일의 `평화적 전도`에는 크게보아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북한이 제시하는 평화적 통일방안을 남한에서 받아들이는 경우다. 둘째는 남한의 진보세력이반제자주정권을 세운 뒤 그정권과 통일할 가능성이다. 섯쨰는 남한 민중이 혁명을 성공시켜 들어설 정권이 북한과 평화협상을 통하여 통일될 가능성이다. 이 가운데 북한이 가장 바라는 통일의 길은 첫 번째이지만, 이는 이상이기 때문에 현실적 대안은 세번째일 것이다. 이것은 남한민중이 주체가 된 혁명이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북한은 무력통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비평화적 전도`에 의한 통일은 전쟁을 통한 길로서 북한에서도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방안이다. 이러한 북한의 통일정책은 내외 정세의 변화와 남한의 대응에 따라 시기마다 바뀌어 왔고, 19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으로 완결되었다남북한 자주적 총선거 통일방안` 해방 직후부터 60년대 `과도적 연방제안`이 나오기까지 북한의 통일방안은 남북한 자주적 총선거 방안이었다. 북한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는 동안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하면서 민주기지 역량을 강화하는 사업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북한은 1948년 3월 말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외국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조건에서 통일정권을 세우려는 자주적 총선거안을 내놓았다. 북한은 이 안을 그해 4월에 열린 `남북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이듬해 6월 주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식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적인 1950년 6월7일에도잇달아 제기하였다.북한은 이러한 제안을 통해 한반도 통일에 대한 북한의 기본원칙, 곧 통일은 민족안의 문제이므로 다른나라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자주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또 이것은 단과정에서북한이남한정권에 대한 상대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남북한에 각각 정권이 수립되어 그 동안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은 더욱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폈다. 그것은 민주기지노선에서 군사역량을 앞세우는 무력에 의한 통일추구, 곧 한국전쟁으로 나타났다. 북한의 무력통일노선은 결과적으로 민족 안의 엄청난 인적,물적피해를 가져왔고, 나아가서는 세계 냉전체제의 축소판으로서 분단고착화의 직접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뒤부터 1960년까지 북한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회 전체를 복구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 북한에게는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평화적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더 중요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사정은 1954년 4월에 열린 제네바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외국군 철수, 남북한 각각 10만 이하로의 감군, 전쟁방지를 위한 협정체결, 다른 나라와의 군사동맹 부인, 경제 문화교류를 위한 위원회 구성, 조선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회담 참가국의 보장 등과 함께 남북조선 대표들로 구성되는 전조선위원회의 구성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직접적은 통일방안이라기보다는 평화통일의 여건을 만들려는 전제조건이었다. 북한이 군축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보더라도 이 시기 가장 절박한 문제는 북한 자체의 안전보장이었다. 이점은 그 동안 통일문제에서 자주원칙을 한결같이 강조해온 북한이 한번도 평화문제를 외국이 보장해줄것을 요구한 데서 잘 나타난다. 북한은 전후 경제복구와 사회주의의 안전한 건설을 위해 통일보다 평화공존이 더 절실하였던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1956년 4월의 제3차 조선노동당대회에서도 확인되었다. 여기서 채택한 라는 선언문에서, 북한은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그 전제조건으로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군대의 감축, 남북대표자회의와 국제회의 개최, 경제 문화교류 및 통행 서신교환, 자유선거 실시등을 제안하였다. 북한은 1958년 2월 `주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제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되풀이 하였다. 80년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 80년대 들어 북한의 혁명노선에는 변화가 없으나 구체적인 방안에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북한은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현재 북한 통일방안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고려문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남과 북에 현존하는 서로 다른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남과 북이 하나로 연합하여 통일연방국가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먼저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국호로 하는 연방국가는 남북 전체를 대표하는 연방정부로서 민족통일
정부와 남북이 각각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지역자치정부로 구성한다. 민족통일정부는 남북한이 같은 수의 대표와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로서 최고민족연방회의와 그 상설기구인 연방상설위원회를 구성한다. 최고민족연방회의와 연방상설위원회는 전 민족의 통일염원에 부응하여 공정한 원칙에서 정치,국방,대외관계를 비롯한 전 민족의 이익에 관계되는 공동문제를 토의 결정하고, 통일을 위한사업을 추진하고 단결을 꾀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남북한의 지역정부는 연방정부의 지도를 받아 민족 모두에게 이익이되는 범위에서 독자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갖는 연방국가는 어떠한 정치, 군사동맹에도가담하지 않는 중립국가로 규정되고 있다. 연방국가는 자주적인 정책실시, 민족의 대단결 도모, 민족경제의 자립발전, 과학 문화 교육에 관한 남북의 교류와 협조, 남북한 사이의 교통 체신수단의 자유로운 이용, 근로대중과 모든 인민의 생활안정도모, 군사대치 상태를 해소하고 민족연합군 조직, 해외동포의 권리와 이익옹호, 평화 애호적인 대외정책 실시 등과 같은 10대 시정방침을 집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은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단일민족 통일정부를 새로 구성할 것을 제시하며 지역자치체를 인정하였다. 또 최고민족 연방회의를 구성하고 연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구체적인통일국가의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고려민주연방제가 과도적 단계가 아니라 통일의 궁극적 방안으로 설정된 것임을 뜻한다. 물론 북한의 입장에서 이러한 통일 방안을 제시한 것이 남한에서 혁명이 일어날수 있음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북한이 이러한 연방제를 제안한 것은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와 사상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고
어느 한편의 사상이나 제도를 강요할 경우, 대결과 충돌을 피할 수 없고, 서로 다른 두 체제를 선거 등을 통해 단일한 사회제도로 합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의 반영이었다. 또 70년대부터 남북한사이에 군사,경제력의 차이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남북한의 대결과 긴장을 완화하고 군사비 부담을 줄이려면 상대방을 인정하는 상호공존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북한은 1984년 1월 10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정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을 남한에서 철수시키는 한편, 남한에 대해서도 서로 무력사용을 반대하고 군대와 군비를 크게 줄이는 불가침선언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는 3자회담(북한,남한,미국)을 제안하였다. 미국은 남한의 참가하지 않는다면 북한과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하지 않는다면서 이 제안을곧바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대미인식에는 변함이 없지만 한반도의 군사문제를 해결하는 데 미국을 중요한 협상 대상자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한당국을 대화의상대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북한 통일문제의 큰 전환이었다.이에 따라 80년대 중분부터 남북한 사이에는 급속한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984년 4월체육회담을 시작으로 경제회담과 적십자회담, 그리고 1985년 9월에는 분단 뒤 최초로 이산가족의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의 서울,평양 공연이 이어졌다. 이러한 다양한 남북한 사이의 교류는 1986년 팀스피리트훈련 문제로 모두 중단되었다. 북한은 한미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훈련을 계속하는 남한정권의 의도에 강한 의문과 불만을 가졌다. 북한은 통일을 이루려면 남북한의 군사,군축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군사문제를 먼저 해결해야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입장은 그 뒤 다양한 군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