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통일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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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의 통일과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東方의 세 국가, 韓國, 中國, 日本. 이들의 역사에는 비록 그 연대가 다르지만, 성격이 유사한 시기가 각각 있었다. 한국의 後三國時代, 중국의 春秋戰國時代, 일본의 戰國時代가 바로 그것이다. 亂世에는 영웅이 반드시 등장한다고 하였던가. 이같은 시기의 삼국에서는 분명 ‘전국통일’을 일궈낸 통치자들이 등장하였으며, 이 글은 지금부터 그 통치자들의 통일과정이 각각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글이 다루는 범주가 매우 커서 각국의 경우를 세밀하게 살피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감히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Ⅱ. 後三國과 統一君主 王建
신라 말기 사회경제적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되면서 크게 성장한 두세력이 바로 궁예와 견훤이다. 궁예는 901년 옛 고구려 지방에 후고구려를 세우며 강력한 힘과 추진력으로 한반도 중부 일대를 장악했다. 또한 900년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전남 광주(무진주)를 자신의 중심지로 삼으며, 한반도 곡창지대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고 경상도 내륙 지방으로 전략적 방향을 돌렸다. 견훤은 무인의 기민함과 지략으로 후삼국의 한 왕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송악산 주변 일대를 토착기반으로 삼아 그 지역에서 가장 큰 해상세력과 경제기반을 확보한 지방세력 출신인 왕건은 궁예의 밑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세력이란 것은 나머지 2인에 비하면 미비해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왕건이 궁예나 견훤과 대결하면서 후삼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강력한 힘과 추진력, 그리고 기민한 판단력과 지략, 카리스마 등을 내세우며 강한 지배력의 확대를 꾀한 궁예나 견훤과는 달리 왕건은 신라는 물론이고 각 지방의 성채를 중심으로 독립해 있는 수많은 독립 지방세력들에 대해 연맹에 가까운 포용정책을 취했음에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위치를 낮추고 상대를 받들어 대접하는 정책(중폐비사)을 내세웠던 것이다. 다른 2인에 비해 느리고 더디었지만, 그 효과는 상대적으로 후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의 포용정책은 그의 인품과 정치, 군사력의 능력과 맞물려 궁예의 밑에 있을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아지태 사건’ 905년 궁예는 청주에서 만난 책사(策士) 아지태의 권고를 받아들여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이라 정하였다. 이는 고려 호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일이라 결국 궁예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청주지방의 1천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수축하는 동안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호족과 농민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궁예가 사용한 국호(901년 고려, 904년 마진, 911년 태봉)를 분석해 보면 자주적인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있지만, 또한 정권의 불안정을 내포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913년 청주파 내부에서 서로 참소, 모함하는 분열이 생기는 소위 ‘아지태 사건’이 발생했다. 왕건은 이 사건에서 아지태를 척결하면서 호족들의 신망을 한 몸에 얻게 되었다.
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왕건의 포용정책은 고려를 건국한 이후 빛을 발하는데, 신라에 대해서 특히 그러하다. 왕건은 고려 초기부터 신라에 대해 동맹적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927년 후백제의 경주 난입 때 왕건의 신라에 대한 태도가 잘 나타난다. 고려군은 신라군의 구원 요청에 따라 급히 남진하게 된다. 왕건의 그와 같은 조처는 신라에 분명한 친신라적 입장을 표명함과 동시에, 신라와의 연계를 통해 후백제를 압박한다는 군사 방략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이 때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일대(대구 팔공산 근처로 파악됨) 에서 견훤군과 맞서 심복 신숭겸과 김락 등이 전사하는 등의 치명적 타격을 받는다. 이 같은 왕건의 포용정책은 위압으로 굴복을 요구하는 궁예와 견훤의 방법보다 확실성 면에서 효과적이지 못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전국에 산재해 있는 군소 지방세력들에게 매우 큰 호소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황해도 지역을 시작으로 경북일대의 독립세력, 후백제의 여러 성의 장수 등 진주(921), 강릉, 경북 안동 부근의 여러 성(명지, 진보등 922), 성주, 벽진(923)등 주로 경북 일대의 독립 세력이 두드러지게 왕건에게 귀부했고, 뿐만 아니라 927년 견훤의 영향력이 막강할 때도 경남 진주와 진주 소관 4향, 고성들이 귀부하였고 이를 계기로 후백제 여러 성의 장수들이 많이 항복해 왔다.
고려는 일반 성주들의 지지와 신라세력의 호의적 여론에 힘입어 서서히 강성해 졌다. 왕건의 포용정책의 효과는 후백제가 930년 정월 고창전투에서 왕건군에게 패한 후 정치적 혼란으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 견훤이 첫째 신검(神劍)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왕건에게 투항한 것과, 그 무렵 신라의 경순왕 또한 군신회의를 소집하고,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한 것에서도 잘 볼수 있다. 군신회의에서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오직 충신과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것인데 어찌 일천년 사업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이랴”라는 반대 의견을 내었다. 이에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한 이 형편에 무죄한 백성만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는 명분을 들어 고려에 귀부 하게 된다. 권12, 신라말기12, 경순왕 9년.
이에 신라는 고려에 항복할 뜻을 결정짓고 시랑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항복문서를 가지고 가서 왕건에게 귀부를 청하게 하였고(935년 11월) 왕건이 경순왕에 베푼 예우는 그가 개경에 당도하자 유화궁에 머물게 하고 장녀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그를 봉하여 정승으로 임명, 1년에 녹을 1천석을 주고 신란궁을 지어 주고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로 삼고 그 지역을 식읍으로 삼는 한편 그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였다.(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9년 및 권2, 세가2, 태조 18년 을미)
936년에는 신검측의 무장이며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가 고려 조정에 내응(內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왕건은 박영규의 의사를 전해 듣고, “만일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한번 합세하여 길에서 막히는 일이 없게 한다면, 곧 장군께 뵙고 다음에는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 라는 답을 보냈다. 일개 무장에 지나지 않는 박영규와 그의 부인에 대한 배려의 약속이 후한 점으로 봐서 박영규가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런 약속을 한 것으로 풀이되며 이것 역시 왕건의 포용정책의 일환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번째로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중심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바로 왕건이 다른 2인과는 달리 토착민 세력이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왕건의 다른 어떤 정책보다 크게 작용한 것으로, 왕건의 지도력과 정책이 호소력을 가지게 된 배경이다. 먼저 왕건은 초기에 궁예세력에 재빨리 귀부함으로써 황해도와 경기 북부 지역의 대표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즉 왕륭(王隆), 왕건 부자는 당시 정세변화를 정확히 판단하고 기민하게 행동함으로써, 예성강 하구의 중간세력에 지나지 않던 자신의 세력기반을 궁예의 휘하에서 성공적으로 확대시켜 나간 것이다. 그리하여 서해안 해상세력 전체를 장악하고 나아가 중부 내륙지방에서도 상당한 지지기반을 확보 할 수 있었던 까닭도 패서(浿西:예성강 서쪽)지역의 핵심이었던 송악(松岳)의 토착세력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착세력이기 때문에 궁예나 견훤에 비하면 중간 세력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후 궁예세력을 역이용하여 상당한 세력을 확보한 다음부터는 출신기반의 약점이 커다란 강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초적세력에서 출발한 궁예나 견훤이 ‘타도 신라’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데 반해, 왕건은 군소 지방세력을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지방 세력들의 눈에는 왕건이야말로 원래 그들과 같은 토착적 지역기반을 가진 세력이자 친신라세력 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 비춰졌을 것이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중폐비사’정책은 당시 지방 세력가들을 규합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대책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왕건의 가문이 송악에 정착한 것은 6대조의 강충이 예성강 부근의 ‘영안촌 부인(富人)’의 딸과 혼인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대에 이르러 개성 부근 4개 주와 강화 부근 3개 현에 걸쳐 세력을 확보해,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해상세력과 지역적 경제기반을 확보한 지방 토착세력으로 성장했다. 진성여왕 10년(896)에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귀순해 오는데, 당시 궁예에게 이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단순히 한 호족의 귀순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패서지역이 궁예의 영향권 아래 들어왔음을 뜻하는 것이었음과 동시에 궁예는 비로소 나라를 세울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에 따르면, 이때 궁예는 이미 건국할 구상을 가지고 있어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이 당시까지는 단지 구상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읍을 종전의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기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한수 이북의 이름있는 군으로 산수가 기이하고 수려했기 때문()” 이라고 했으나, 사실 왕륭의 중심지인 그 지역을 접수함으로써 세력을 확실히 장악하고, 이와 함께 황해도 패서 지역과 경기도 북부지역의 생산, 경제기반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서해안 해상세력을 장악함으로써 해로를 열어 해상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 필요도 있었다. 아울러 궁예는 왕륭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기게 하여 철원군 태수를 맡겼으며, 이때 왕륭이 송악 성주로 왕건을 추천한 것은, 송악 지역의 세력기반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을 주장했다는 의미이다. 궁예는 그러한 상황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절충하고자 했던 것이다. 궁예는 이런 성과들을 바탕으로 효공왕 5년(901)에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며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불렀다. 신라 왕자출신인 그가 는 그의 아버지를 47대 헌안왕(憲安王)으로 적으면서, 혹은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 전한다. “일관(日官)이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 하니 기르지 마옵소서’ 라고 하자 왕이 중사(中使)에게 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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