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종교분쟁 이라크 종교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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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라크 종교분쟁 이라크 종교분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현재 이슬람권의 90% 정도가 수니파이고 10% 정도가 시아파다. 하지만 두 종파로 구분하기 애매한 소수 종파도 적지 않다. 시아파는 지금의 이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반면 수니파는 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다. 시아파의 최대 종주국은 이란이고, 시아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나라는 이라크와 오만, 예멘, 레바논, 바레인 등이다.
시아는 ‘시아트 알리(Shiat Ali)’의 약칭으로 이슬람의 4대 칼리프(정교일치의 최고 통치자) 알리를 추종하는 종파 집단이다. 처음부터 수니 종파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아파가 주류집단을 박차고 떨어져나가자 예언자의 언행인 순나(Sunnah)를 따르는 집단이란 의미로 기존 집단을 수니로 불렀다. 알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로 무하마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또 그는 두 번째 이슬람 개종자로서 탁월한 용맹성과 지혜를 가졌으며 시종일관 무하마드의 곁에서 성실하게 그를 보필했다.
632년 무하마드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이슬람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누구를 후계자인 칼리프로 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리의 추종자들은 예언자의 혈육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알리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 부족장 회의 슈라(shura)에서는 아부 바크르(632~634)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다. 슈라에서 만장일치 합의제(이즈마)로 칼리프를 선출하는 방식은 초기 이슬람 사회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2대 칼리프 우마르(634~644), 3대 칼리프 오스만(644~656)이 이 방식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우마르와 오스만 모두 예배 도중 반대세력에 의해 무참히 피살됐고 이후 알리가 4번째 칼리프로 등장했다. 그런데 알리가 오스만의 살해세력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무하마드의 부인이자 오스만을 지지했던 아이샤의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됐다. 두 세력간의 알력은 전쟁으로 비화됐고 656년 최초 이슬람 내전이라 할 수 있는 낙타전투에서 알리가 승리한다. 그러자 오스만의 사촌이었던 무아위야가 알리에게 대항했다. 창 끝에 코란을 달고 돌진하는 무아위야의 군대를 향해 알리는 화해를 요청했고 협상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화해 협상에 대해 불만을 품은 알리의 강성 추종자는 661년 알리를 살해한다.
②두 번의 배반 후 완전히 갈라져
-시아파는 알리의 장자인 하산이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직적 군대를 가졌던 무아위야는 스스로가 칼리프임을 선포했고 하산에게 칼리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하산은 다음해 갑자기 목숨을 잃는다. 시아파들은 무아위야가 하산을 독살했다고 믿고 있다.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은 현실적 상황을 받아들여 무아위야가 살아있는 동안 칼리프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다. 이는 무아위야의 사후 칼리프직을 후세인에게 물려주겠다는 묵시적 선언이었다. 그런데 680년 무아위야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야지드는 약속을 깨고 칼리프직을 찬탈했다. 후세인은 즉각 야지드에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680년 시아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카르발라 전투가 벌어졌다.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장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모두 처참히 살해당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후세인의 어린 아들 알리만 겨우 피신해 시아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르발라 전투 후 이슬람 세계에서 정통 칼리프 시대는 끝나고 왕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시아파들은 통한의 응어리를 안고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별도의 둥지를 틀었다. 이후 예언자의 혈통인 후세인이 무참하게 도륙당한 680년 이슬람력 1월10일은 시아파에게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후세인의 묘당이 있는 카르발라는 시아파 최고의 성지가 됐으며 1월10일은 그의 무덤을 순례하는 가장 의미 있는 날이 됐다.
모든 시아파 순례객들은 예리한 칼로 자신의 몸을 난자하며 피를 뿌리는 끔찍한 행진을 한다. 당시 후세인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다는 종교적 동일체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동시에 예언자의 혈족을 살해하고 종교적 신성함을 훼손한 수니파에 대한 역사적 원한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칼리프직을 찬탈했던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조는 750년 아부 알 압바스 장군에 의해 멸망한다. 이때 무하마드 가문 출신인 압바스는 시아파의 절대적인 협력을 받으며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후세인의 증손자인 자파르 알 시디키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칼리프로 옹립하려는 구상을 했다. 하지만 754년 압바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 만수르가 자파르를 살해하고 자신이 칼리프로 취임했다. 시아파로서는 두 번째 배반을 당한 셈. 이 왕조가 압바스 제국으로 1258년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500년간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다. 시아파는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몇몇 시아파 왕조를 건설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16세기 현재 이란 지역에 시아파인 사파비 왕조가 들어선 후 대다수 국민들이 시아파로 개종했다. 이것이 현재 최대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모태다.
이처럼 수니파와 시아파는 교리적 논쟁이 아닌 계승권 분쟁을 둘러싼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갈라졌다. 혈통 계승을 주장하는 시아파에게 유일한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사촌인 알리뿐이다. 그 전 세 명의 칼리프는 찬탈자로 간주한다. 이런 정치적 견해 차이를 제외하면 두 종파간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 코란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마지막 예언자 무하마드를 따르는 기본적인 코드는 서로 같다.
③결정적 의식의 차이 ‘아슈라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