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이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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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요한 이서 주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요한이서는 적그리스도의 문제와 사랑의 계명에 관한 문제 등에 있어 요한일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또한 전체적인 구조면에 있어서는 요한삼서와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요한이서는 요한일서, 요한삼서처럼 당시 요한 공동체가 처했던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한 공동체가 당시 겪었던 상황은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던 위기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장로 요한은 공동체 모두가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요한이서를 통해 재차 확인하고, 권면하며, 나아가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힘을 쓰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이해
▲ 1~3절(문안인사)
1절에서 언급되는 저자인 ‘장로’는 헹엘이 말하고 있듯이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특별한 설명 없이도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던 존재이며, 중요한 권위를 지닌 교사였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그것에 대한 유대적 근거에서도 도움 받을 수 있다. ‘장로’(haz-zaqen)라는 말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그리고 가말리엘 1세와 같은 70년 이전의 유대의 위대한 교사들이 실제로 노인들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 붙여진 명예로운 칭호였다. 특히 라반 가말리엘 1세는 나중에 그의 손자와 구별되어 ‘그 나이 많은 이(the old one)로 불리었다. 아마도 장로 요한에게도 그가 고령에 이르렀을 때 그 당시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세베대의 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 명칭이 주어졌을 것이다. 요한2서와 3서의 ‘장로’에게서 우리는 또한 중요한 권위를 지닌 한 교사를 본다. 그 교사는 한 공동체에만 묶여 있지 않고 자신에게 의존하는 다른 교회에도 가르침을 주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Martin Hengel,《요한문서탐구》,사도요한-장로요한-요한학당-그리고 요한문서의 역사적 연관(전경연김수남 옮김),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110-111쪽
다음으로 장로라는 칭호는 헬레니즘 세계보다는 팔레스타인 환경에 더 익숙하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일차적인 의미에서 장로는 나이가 많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나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케제만은 ‘장로’라는 칭호가 매우 특별한 의미로 직제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서신을 통해 아직까지는 제도화된 개념으로서의 ‘장로’라는 개념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삼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장로가 선교사들을 파송한 것과 관련하여 디오드레베는 장로의 신학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초대 교회 안에 등장하고 있는 이단, 그리고 요한이서와 일서를 연결해서는 영지주의적인 가현설주의라는 신학적인 노선을 관찰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 볼 때, 장로의 편지들, 특히 이서와 삼서는 그의 급박한 신학적인 대응이며, 디오드레베라고 하는 반대파의 입장을 차단하는 기능을 보여준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장로’라는 칭호는 요한 공동체의 대표성을 띠는 성격을 가지며, 그 즉시 양쪽의 입장은 대립적인 투쟁으로 옮겨간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나는데, 장로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적대자들은 예수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장로는 그것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대표자다. 따라서 이런 이해를 가지고 케제만처럼 장로를 종파적인 인물로 보고, 디오드레베를 초대교회의 발전 단계에 있는 초기 보편교회의 군주적인 감독직의 대표자로 보는 시도는 정당하지 못하다. 임진수, 《요한서신들의 영과 직제에 관한 연구》, 신약논단 제10권 제2호, 2003년 여름 477-480쪽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라는 부분에서 수신자를 실제의 인물로 볼 것이냐(플러머, 로스, 라일리), 아니면 교회공동체로 볼 것이냐(브루크, 브루스, 마샬, 스토트, 웨스트코트)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단수형보다(4,5,13절) 이인칭 복수형(6,8,10,12절)이 지배적으로 사용된 사실은 수신인이 공동체임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를 여성으로 의인화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여자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어미’로(사54:1-8 ; 갈4:25 ; 계12:17), 또 신약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간주하는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엡5:29 ; 고후11:2), 베드로도 바벨론에 있는 교회를 묘사할 때 여성형으로 말하고 있다(벧전5:13). ‘교회’를 의미하는 헬라어 εκκλησια(ekklesia)는 여성형이다. 성서적인 의인법을 상기해볼 때, 요한이서의 전체적인 언급이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이 절에서 언급하는 바는 “선택된” 회중으로서의 교회를 암시할 것이다. 한의신, 《성서주석:요한 일이삼서》대한기독교서회, 431-432쪽
반면 ‘택하심을 입은 부녀’를 실제인물로 볼 수도 있는데 이는 여성지도자들의 존재가 신약의 다른 곳들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히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골4:15)와 겐그레아교회의 사역자 혹은 집사인 뵈뵈(롬16:1)를 언급할 수 있다. 따라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는 어떤 지방 교회를 지도했거나 자신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자녀’는 아마도 그녀의 육체적 자녀들이라기보다는 그녀의 가정교회의 교인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택하심을 입은 부녀’를 어떤 개인으로 본다 해도 본 서신은 역시 한 교회에 쓰여진 것이다. Ruth B. Edwards, 《요한서신》(김병국 번역), 서울: 이례서원, 2000, 44-45쪽
그런데 여기서 ‘택했다’(선택되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적대자들과 구분되는 요한공동체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6: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15: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장로가 서신을 보내는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제자로 선택되고 임명되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절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에서 참으로는 원문에서는 "εν αλεθεια"로서 “진리 안에서”라는 뜻인데, 번역서들은 ‘참으로’, ‘진실로’ 등으로 번역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αλεθεια는 궁극적으로 ‘예수’를 의미함으로(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 안에서(예수 안에서)”로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요3:16)과 공동체 안에서의 윤리적 책임을 수반하는 사랑(요13:34, 15:12)으로 볼 수 있다. 요한일서(4:2-3, 3:16-18)에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무책임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2절의 ‘영원히’에 대해서는 요한일서 1장 2절의 영생에 대한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의 개념에서의 길이가 아니라 생명의 신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서 모든 선지자들에게 주는 영적인 성질이다(요3:16 ; 17:2-3). 그것은 무한으로 연장되는 생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아버지와 교제하는 삶을 나누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한의신, 45쪽
3절에서 장로의 인사말은 축복으로 서론적 결론을 맺는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와 같은 형식은 신약에서 디모데전서 1장 2절과 디모데후서 1장 2절에도 나타난다. “은혜”라는 성서적 용어는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죄인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아낌없이, 값없이 나타낸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긍휼과 평강”은 유대적인 형태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의 방식은 요한적인 색채를 보여준다. 정상적인 신약의 인사형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쫓아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갈1:3)이다. 장로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명과 힘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후자의 표현은 독특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요한의 일반적 용법으로 여기서는 예수와 아버지 간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이는 요한신학의 한 특징이다. 장로의 인사말은 “진리와 사랑 안에”라는 구절을 추가함으로 끝맺는다. 어느 경우든지 “진리와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신앙생활에 있어야 하며, 이는 요한공동체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교회는 진리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사랑 가운데 진리를 고수하도록 부탁받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장로로 하여금 “진리와 사랑 가운데에서의 삶”을 이 편지에서 논하게 한 것이다. 한의신. 436-437쪽
1-3절을 정리해 보면 크게 서신을 시작하는 인사말로 볼 수 있지만, 이곳에서 ‘진리’(αλεθεια)라는 단어가 총 4번이나 나온다. 이는 장로가 ‘진리’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한복음(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에서 언급되었듯이 ‘진리’라 함은 궁극적인 실제를 의미하는데, 이는 결국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자신이며 기독교적 선포에 나타난 실제의 표현을 의미한다. 위의책, 4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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