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정치&강화도조약&갑신정변&갑오개혁&광무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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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정치&강화도조약&갑신정변&갑오개혁&광무개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넷째아들이지만, 남연군이 어릴 때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됨으로써 족보상으로는 사도세자의 가계가 되었다. 헌종 9년(1843) 흥선군에 봉해진 그는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 종친들이 형식적으로 맡는 한직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때는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 불렸던 천의현, 하청일, 장순규, 안석주 등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지내고, 세도가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하응은 이런 한편 안동 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익종비 조카 조성하와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해 조대비에게 접근해 대안동 김씨 연합전선을 결성했다.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하세했을 때 준비된 안이 없었던 안동 김씨는 우왕좌왕 했으나, 미리 흥선군과 결탁했던 조대비는 궁궐 웃어른의 지위를 이용해 전격적으로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철종의 후사로 발표하였다. 이로써 이하응은 임금의 생부인 대원군으로 승격되었다. 조대비와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력을 꺾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으나 그 최종 목적은 달랐다. 조대비의 목적은 대원군을 이용해 풍양 조씨 일문을 부흥시키는 것이었고, 대원군의 목적은 안동 김씨는 물론 풍양 조시를 포함한 외척세력에 억눌려 극도로 위축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즉위 당시 명복은 12세였으므로 조대비가 섭정했고, 흥선대원군이 조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권력을 장악했다.
2. 흥선 대원군 집권시 배경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 자본주의 열강들의 서세동점으로 커다란 변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조선의 상국이었던 청은 1841년, 아편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홍콩 할양, 광동*상해 등 5개 항의 개항 및 영사재판권과 관세협정권 등을 규정하는 남경조약을 체결해 문호를 개방해야 했다. 또한 1860년에는 영불 연합군의 천진 함락과 북경 진격에 굴복해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구룡을 영국에 할양하는 등 서구 열강들에 완패당하고 말았다. 일본 역시 미국 동인도 함대 제독 페리의 무력시위 끝에 5개 항의 개항과 외국인 거류지의 치외 법권 인정 등 불평등한 내용이 담긴 미일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조선은 이러한 대외적 위기 상황 속에서 국력을 모으기는커녕,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세도정치로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삼남 지역 전체가 민란에 휩싸인 ‘임술민란’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곡창지대백성들이 대거 가담한 이런 대규모 민란은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조선이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도 있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3. 개혁정치
(1) 백성들의 환호를 받은 민생, 생활개혁
대원군은 민란의 주요한 원인이던 ‘삼정’을 바로잡아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넓히려고 했다. 전정, 군정, 환정의 폐단은 이 시기만의 문제만은 아니었으나, 세도정치를 거치면서 민란이 전국을 휩쓰는 데 중요한 원인이 될 만큼 심화되었다.
1) 군역개혁 : 부유한 양반들은 면제된 채 가난한 농민들만 부담을 이중으로 져야했던 군정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대원군은 호포법을 시행해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았다. 이로써 일반 양인들만 지고 있던 군역의 의무를 양반 사대부들도 지게 되었다.
2) 전정개혁 : 지방관과 양반 토호들이 의도적으로 토지대장을 누락시켜 전세를 착복하던 땅을 찾아내 과세하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3) 환곡개혁 :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되돌려 받는 환곡은 빈민구제책으로 시작되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지방관과 아전들의 배를 불리는 고리대로 변질되었다. 대원군은 환곡에 대한 지방관과 아전의 중간착취와 횡령을 엄단하는 한편 고종 3년(1866)에는 환곡 대신 ‘사창’을 설치하고 부유한민간인을 사수로 삼아 면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했다. 사환제라고도 불렸던 사창제는 갑오경장 이후 근대적 금융조합이 출현하는 밑바탕이 될 정도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2) 독점 권력의 해체, 비변사의 폐지
비변사는 중종 5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처음 설치된 비상대책기구였으나, 명종10년의 을묘왜란을 계기로 정식 관청이 되었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군사는 물론 정치, 경제, 외교, 문화를 총괄하는 거대 기관으로 변모해 왕권을 크게 위축시켰다. 집권당의 주요 인물들이 비변사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비변사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것은 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였다. 대원군은 집권 초기부터 비변사 개혁에 나섰고고종 2년 3월 의정부와 비변사를 하나로 통합하되 비변사는 의정부의 조회 때 조신들의 대기실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형식상 통합이지만 사실상 비변사의 폐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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