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동성동본 금혼제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동성동본 금혼 규정이란 쉽게 말을 해서 같은 성과 같은 본관인 남녀는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다. 예를 들어 같은 전주 이씨인 남녀의 경우에는 혼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민법 제 809조 1항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와 2항 “남계혈족의 배우자, 夫의 혈족 및 기타 8촌 이내의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에 의거한 것이다.
동성동본 금혼제도의 정착과정과 그 사회적 기반 자료에 의하면 동성동본 금혼제도가 우리나라에서 정착하게 된 역사적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원래 동성금혼은 중국의 주대부터 시작되어 한 대에 이르러 완성된 종법제와 함께 확립된 제도로서 남계혈족 즉, 본종은 백대에 이르더라도 일가로 대한다는 혈연관계를 중요시하는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이와 같은 사상은 고려중기부터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경우는 동성은 모두 동종으로 보아 혼인을 금지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동성동본인 경우에만 동종으로 보아 혼인을 금지하였다.
이 제도의 정착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유학의 영향이 커지기 이전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혼인방식에 관하여 중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조에 “동성금혼”이라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그 의미에 관하여는 후대의 동성금혼과 같다고 볼만한 뚜렷한 다른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왕실과 귀족사회에서는 골품제라는 혈연집단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근친간의 내혼제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도 최소한 중기에 이르기까지는 신라와 같이 왕실에서 내족혼이 행하여지다가 고려 정종 12년(1046년) 5월 동성혼의 자에게 벼슬길이 금지되고, 그 후 문종 35년(1081년)부터 근친혼 금지령이 나타나면서부터 왕실이나 민간에서 근친혼 내지 동성혼이 금지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도 처벌에 관한 규정이 없는 권조적인 것에 불과하였으며, 그 후에도 몇 번에 걸친 근친혼 금지의 조치가 있었으나 그 금지 범위는 4촌 내지 8촌에 한하였다고 자료에 적혀 있다.
조선은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하면서 명률을 의용하였고 그 결과 동성동본금혼의 원칙이 서시히 세워지게 되었으나, 이 원칙이 보편성과 실효성을 가진 규범으로 발전된 것은 조선 후기 영조조에 이르러 속대전 예전 혼가조에 동성이본혼까지를 금지함에 서 비롯되었고 조선말 형법대전에서는 다시 동성동본혼 만을 금지하면서 위반자에 대해서는 형벌까지 부과하였다.
한편 이와 같이 동성동본혼을 금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신 상민의 경우는 물론 반가에서조차 동성동본간에 혼인을 한 사례를 문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내혼제가 아닌 외혼제로서 동성동본금혼제가 실제로 법제화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고, 더욱이 그 확립시기는 17세기 후반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관계 자료에 의하여 살펴보면 이러한 동성동본 금혼제는 결구 그 제도 생성당시의 국가정책, 국민의식이나, 윤리관 및 경제구조와 가족제도 등이 혼인제도에 반영된 것으로서 그 윤리적국민의식적 기반은 충효정신을 숭상한 유학이었으며, 국가정책으로서는 왕조를 중심으로 한 신분적 계급제도의 정착이었고, 가족제도는 남계를 중심으로 한 족벌적가부장적 대가족 중심의 가족제도이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의 원칙으로 한 농경중심의 사회이었는바, 그러한 사회에서 그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