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정치 문화 사법제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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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원나라의 최고 주권자는 쿠빌라이칸과 그 적계 자손에 한정되어 그 권한은 초월적인 것이었다. 정치적 권력을 대표하는 중앙의 주요한 정치기구는 당시 성원대로 약칭되었던 3대 관청인 중서성추밀원 및 어사대였다. 중서성은 황제의 명령인 법령을 입안기초하는 기관으로 그 아래에 이호예병형공의 행정 6부를 두고 그 법령의 시행을 맡았다.
중서성의 장관인 중서령은 가장 영예로운 관직으로, 황태자가 이를 겸하였으며, 그 아래에 우승상좌승상평장정사 등의 재상과, 참지정사우승좌승 등의 부재상을 두어, 중요한 정무는 모두 재상부재상들의 합의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추밀원은 군사조직을 통할하는 기관으로, 이것 역시 황태자가 겸하는 장관인 추밀원사 아래에 지원원사동지부사 등의 여러 관직을 두었는데, 이 밖에 특히 중대한 군사기밀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중서성에서 평장정사 한 사람이 파견되었다.
마지막으로 어사대는 관료기구의 숙정과 쇄신을 이루기 위한 감찰기관으로, 장관인 어사대부, 차관인 중승 아래에 많은 감찰어사를 두어 끊임없이 여러 행정기관들을 순찰해서 부정을 적발하고 또한 민간의 풍기 유지, 교육의 진흥을 맡았다. 이상의 3대 관청 외에 재무를 맡아보던 제국용사사, 뒤에 승격해서 상서성으로 개칭한 특수관청이 있었는데, 이는 비상시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타개하려 임시적으로 두었던 것으로 목적이 이루어지면 폐지되었다.
성원대의 3관청은 원래 상도대도를 포함한 직례지를 직접 관할하였으며, 그 밖의 지역에는 이를 대행할 출장기관으로 행중서성행추밀원행어사대를 두었는데, 뒤에 점차 정리되어 상설관청이 되었다. 그러나 군정은 일원화의 필요성에서 비상시가 아니면 행원을 두지 않고 모두 중앙의 추밀원이 관할하였다.
지방의 행성 및 행대는 비록 중앙의 성대에 비해서 지위는 낮았으나, 모두 황제에 직속되는 관청으로서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들 대관청의 아래에 소속되는 지방행정 관청으로 선위사가, 지방재무청으로는 전운사, 지방감찰청으로는 숙정염방사가 있었다.
또한 이들 관청 아래에는 노부주현사의 지방행정관청을 두었다. 지방행정관청의 수령은 대개 그 지방의 지식인을 임명하였으나 지방행정을 점검하는 정치감찰관으로 다루가치라는 관직을 두어 반드시 몽골인이나 색목인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현지 출신 관리에 대한 감시제도는 정복왕조였던 원나라의 특징이었다.
한편 몽골의 군사제도는 처음에 몽골 귀족의 자제로써 조직된 케시쿠타이라 하는 궁정조직이 있어서 황제의 신변주위에서 호위를 하던 친위군의 역할을 하였으나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의장병의 존재로 변하여 그 대신 일반몽골인한인, 또는 서방 투르크계 유목민의 정예로써 선발 조직된 시위군단이 군의 중핵을 이루어 황제의 신변과 수도 근교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경사의 외곽을 이루는 화북일대에는 일반 몽골군으로 편제된 4개의 몽골도만호부라는 병단)이 요지에 주둔하였다. 이를 둘러싸는 양쯔강 주변에는 강남에 22익, 후광쓰촨에는 6익씩 주로 한인으로 구성된 한군만호부를 진수시켜 원나라 정권의 거점인 직례지역을 이중삼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이들 병단의 편제에 있어서 처음부터 남송의 유민을 배제하였던 것은 역시 정복왕조로서의 경계심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 문화
원나라는 많은 이민족문화를 수용하고 있던 다민족국가였고, 복합적 사회였으며, 거기에 지배민족인 몽골인 사회는 근각을 존중하는 봉건적 신분제사회였다. 따라서 통치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좇아서 이를 규제하려 하였다. 먼저 몽골인을 국족, 서방계의 투르크 이란 유럽인을 색목인, 금국의 유민 즉 화북의 백성을 한인, 강남에 사는 남송의 유민을 남인이라 불러서 구별하였다.
이 가운데 원나라의 황실을 비롯해서 유목영주층 몽골귀족층이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북방의 초원에 광대한 유목지를 소유하고 케린코라 불린 다수의 가내노예를 사역하였으며, 중국의 내지에도 여러 곳에 식읍을 급여하여, 이른바 ‘투하된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층이었다.
다음 계층은 몽골제국 또는 원나라 정권의 성립에 훈공을 세운 색목인 및 한인으로, 여기에는 대개 군벌 출신자가 많았다. 그 다음의 중간층은 하급의 이원 출신자나 무인 출신자로, 폭넓게 원나라정권을 받쳐주었던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최하위층은 이들 특권적 신분에서 완전히 배제된 한인남인의 대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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