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 생애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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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생애 레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등소평은 1904년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등소창, 자는 문명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은 땅이 약간 있고 일꾼 몇을 두고 농사를 짓는 소지주 정도의 신분에 불과했다. 이 당시 대외적으로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으로의 침략에 손길을 뻗기 시작했고, 중국 내부에서는 1905년 손문이 결성한 중국동맹회 등에 의해 혁명의 열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는 시기였다. 중국동맹회는 1907년부터 꾸준히 혁명 봉기를 시도하여 마침내 1911년 무창 봉기를 선두로 하여 호남, 성서, 강서, 산서, 상해, 정강, 광동에서 봉기하여 중국 24성 가운데 14성이 청조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12년 남경에서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청조의 마지막 희망으로 혁명군을 탄압하러 보내졌던 원세개가 손문과 협의를 거쳐 자신이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는 조건으로 청조에 등을 돌림으로써 2월 12일 선통제가 퇴위하고, 이로써 끝내 청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마저 원세개의 황제가 되려는 야심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고 원세개는 중화제국을 세워 황제가 되려고 했으나 다시 혁명파들의 제제(帝制)반대를 요구하는 무장 봉기로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울분 끝에 죽고 말았다. 원세개가 죽음으로써 중국 각 지방은 그 지역의 군벌들에 의해서 지배되게 되었다. 이처럼 등소평은 중국의 봉건적 사슬을 끊어버린 혁명 전야에 태어나 혼란스러운 중국 상황에서 성장하였다. 한편 이 당시 중국에서는 해외 유학을 거쳐 귀국한 혁명가들이 많았는데 이들에 의해 중불교육회, 근검공학회 등이 설립되어 해외 유학의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던 지식인들에 의해 프랑스로의 유학이 많았었다. 등소평도 비교적 부유한 집안과 깨어있는 아버지 덕분에 이러한 운동에 힘입어 프랑스로의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파리 유학 중이던 1924년 당시 20세의 나이로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9년 광서성(廣西省)에서 폭동을 주도했고 농공홍군(農工紅軍) 제7군과 제8군을 창설해 혁명거점을 건립함으로써 일찍이 혁명가적 기질을 보였다. 1933년 모택동을 지지하고 장정에 참가하였다. 항일 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에서 정치 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등소평은 오뚝이라 불릴 만큼 여러 번의 실각과 복직을 반복했다.
첫 번째 실각: 그는 1933년 공산당 국제파에 의해 국민당 군대와의 투쟁방법을 달리 주장한 모택동 파로 몰려 강서성 당서기직에서 해직됐다. 1934년 국민당 군대의 포위를 뚫고 홍군(紅軍)과의 장정을 시작한 등소평은 1935년 당 중앙비서장으로 뽑히며 다시 정력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두 번째 실각: 1966년 문화혁명 초기 유소기와 함께 모택동 파인 홍위병(紅衛兵)의 행동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고, 모택동의 분노를 사며 1967년 7월 공직으로부터 파면됐다. 그리고 1968년 10월에는 강서성으로 유배되어 기계공장에서 일을 하는 혹독한 시련을 당했다. 1973년 3월 주은래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세 번째 실각: 1975년 당정치국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부총리와 군총참모장도 겸임하게 된 그는 문화혁명의 급진노선을 비판했다. 그러나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한 후, 모택동의 추종자인 문화혁명파 4인방에 의해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1976년 10월 모택동의 사망과 함께 화국봉이 주은래 계열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국봉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1977년 7월 등소평은 복직되었다.
그 후 화국봉과 5년간의 권력 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사상
1)실사구시 사상의 제기
등소평은 자신의 모든 공직이 회복된 1977년 7월 당 11기 3중전회 연설에서 ‘사실로부터 진리를 규명한다’는 모택동의 슬로건을 주창했다. 등소평은 실사구시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기초인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사상의 정수가 된다고 말함으로서 실사구시의 이론적 근거가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사상의 단절이 아닌 연속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현재 우리들이 4개현대화를 실현하려면 실사구시에 의존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4개현대화의 이론적 틀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기초로 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말하고 있다.1)
그러나 등소평은 모택동에 대해 “모택동은 실사구시, 즉 모든 것은 현실적 상황으로부터 출발해서, 이론과 실천이 서로 결합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시각을 망각하고 포기했으며, 심지어 반대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실사구시를 통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2) 등소평의 실천론
참고문헌
참고문헌
해리슨 E. 솔즈베리,『새로운 황제들』(서울: 다섯수레, 1993)
김덕환『중국의 어제와 오늘』(http://myhome.naver.com/mugam20/)
조너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서울: 이산, 1998)
上揭書
姜春華, 前揭書
金永文徐輔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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