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음악 레포트

 1  바로크 음악 레포트-1
 2  바로크 음악 레포트-2
 3  바로크 음악 레포트-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바로크 음악 레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프랑스는 자신의 분명한 민족적인 어법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왔으나 이탈리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의 영향은 17세기 전반에 특히 심했다. 프랑스는 1630년대에 민족적인 음악 양식을 발전시키지만 그 발전은 앞으로 100년 가량이나 발전 없이 머뭇거리게 된다. 국민적인 양식을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87))는 플로렌스 출신으로서 13세에 귀족 부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기 위해 프랑스로에 왔다. 그에 의해 프랑스 음악의 민족성이 지켜진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독일은 1618년에서 1648년에 이르는 30년 전쟁으로 문화적 후진국으로 전락한다. 30년 전쟁은 신구 양파의 종교적 전쟁으로 독일 전역을 황폐화시킨다. 17세기 중엽 이후 이탈리아 양식은 독일 작곡가들이 세워야할 음악의 기본 원리로 받아 들여졌다.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세대들이 놀라운 업적을 이루게 된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가장 유명하다. 바하의 예술은 대부분 이탈리아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헨델의 작품은 독일적이라기 보다는 이탈리아적이다.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트와 야코비안의 음악적 영광은 시민혁명(civil war)과 커먼웰스(commonsealth)로 인해 사라진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탈리아 양식이 다시 부흥해 영국의 음악은 이탈리아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된 지경에 이른다.
미국 대륙이 식민지화되는 시기인 1600년부터 1750년까지 유럽은 절대 군주들에 의해 지배된다. 유럽의 대부분의 궁중은 음악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루이 14세(1643-1715 통치)의 프랑 궁중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음악의 후원자는 교황, 황제, 영국과 스페인의 왕, 이탈리아와 독일 소국들의 통치자들이었다. 베니스, 북부 독일의 작은 마을 등과 같은 도시 국가들은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 모두에 기여하였다. 물론 교회는 음악의 중요한 후원자였지만, 그 전과 비교할 때 바로크 시대에서는 덜 중요한 후원자이다. 귀족, 시민사회, 교회 등의 후원자와 더불어 사적인 모임인 아카데미(academy)가 많은 도시에서 음악의 후원자로 등장한다. 돈을 내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회는 아직 드문 편이었다. 표를 사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회는 런던에서 1672년에 처음 생긴다. 독일에서는 1722년, 프랑스에서는 1725년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음악회가 열린다. 그러나 이런 음악회가 보편화되는 것은 1700년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음악과 나란히 다른 예술과 학문이 발전한다. 17세기가 서구 문명이 얼마나 위대한 시기였느냐 하는 것은 당시의 저술가와 예술가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영국에는 존 돈(John Donne)과 밀튼(Milton), 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Cervantes), 프랑스에는 꼬르네이유(Corneille), 라신느(Racine), 몰리에르(Moli?e) 그리고 네더란드에는 음악의 전성기는 지났으나 루벤스(Rubens), 렘브란트(Rembrandt)와 같은 위대한 화가를 배출한다. 스페인은 고립되어 있어서 음악적으로는 2류였지만, 벨라케즈(Vel?quez), 무릴로(MUrillo) 등의 최고의 화가를 낳는다. 이탈리아에서는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 건축가 보로미니(Borromini)가 활약했다. 베이콘(Bacon), 데카르트(Descarte), 라이프니츠(Leipniz), 갈릴레오(Galileo), 케플러(Kepler), 뉴튼(Newton) 등의 이름을 보면 이 시기가 근대의 과학, 수학, 철학 등의 기초를 쌓은 위대한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크(baroque)라는 용어에는 불규칙적이며 때로는 기묘한 형태로 된 이상적인 모습을 추구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일그러져 사용할 수 없는 진주를 가리키는 뜻을 어원으로 한 이 단어는 처음에는 멸시적인 뜻으로 쓰여 졌으나 후에 그런 함의는 없어진다. 대개 1600년부터 1750년에 걸친 예술의 양식을 가리켜 사용되고 있다. 음악에 있어서의 바로크는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 통주저음)의 발명, 반주가 딸린 모노디와 함께 태어나, 신양식(stile moderno)으로 출발한 음악이다. 바로크 음악은 심사숙고해서 만들어진 음악으로서 고전 양식이 사고의 비약에 힘입어 이루어진 음악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다이내미즘이 그 음악의 성격으로 나타나, 변화와 풍부함을 추구하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매너리즘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음악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바로크 양식은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허영심에 의해서 지나칠 정도로 추구된 장식법이나 묘기에 대한 선호가 배경이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바로크는 비현실적이고, 상궤를 벗어나 있으며, 대조성이 강조된 세계, 예를 들어 음 크기의 대조인 포르테(f )와 피아노(p )의 대비를 창조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된다.
또 하나의 바로크 음악의 공통된 특징은 음악을 사용하여 생각과 감정을 생생하고 격렬하게 표현 또는 재현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분노, 흥분, 장엄, 영웅심, 명상, 신비, 기이함 등의 감정 등을 표현하려 노력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적 효과를 강렬한 대조를 통해 강조하였다. 바로크의 건축, 조각, 회화에서 때로 그 대상들이 과도하게 왜곡되는 것은 바로 대상 자체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 예술가의 격정적인 심정을 표현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이렇게 표현된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반화된 감정이었다. 그것은 음악적 모형 또는 착상이라고 불리 수 있는 것들을 모아 놓은 공통된 창고에서 체계적으로 규제된 어법에 의해 전달되었다. 바로크의 수사법(rhetorics)은 음악 역시 서론, 본론, 꾸밈, 강조, 결말 등의 순서를 따라 만들어진고 보았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 이론서들은 음악의 전개 방법을 수사학에서 사용되는 모형과 기법에 비유하였고 수사학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몬테베르디에서 바하에 이르는 바로크 작곡가들은 가사의 어떤 구절의 뜻을 강조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일정한 선율, 리듬, 화성, 성부짜임새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적 어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언어였다. 우리가 바로크 음악을 대할 때에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는 바로크 시대에 탄생하고 발달했다. 또한 바로크 시대는 기악 음악의 발전이 그 기초를 닦은 시기로서 콘체르토, 소나타, 건반악기(특히 오르간)를 위한 여러 작품이 생겨났다. 이들 악곡에는 그 용도에 따라 크게 나누어 세 그룹을 이룬다. 즉 교회(Chiesa)를 위한 음악, 실내(Camera)를 위한 음악, 그리고 극장(Teatro)을 위한 음악이다.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실내 소나타(sonata da camera)의 차이는 후자가 오페라와 같은 극음악과 내용적으로 가깝고 춤곡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은 3개의 성부로 음악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바의 견고한 베이스 위에 유려한 선율이라는 개념에 맞기 때문이다. 두 개의 선율 성부(목소리 또는 악기)가 세 번재 성부인 통주저음(basso continuo)에 의해 받쳐진다. 통주 저음은 스스로 화음을 낼 수 있는 악기(하프시코드 또는 오른간)과 저음만을 내는 악기(저음 현악기, 첼로 또는 바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하프시코드와 첼로는 동일한 저음을 연주한다. 통주 저음의 보편화는 화음의 진행에 대한 감각 즉, 조성적 감각을 확대시켜 조성을 확립시키고 조성 안에서의 화음의 의미를 학실히 하게 된다.
반주가 딸린 모노디(monody)와 오페라가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달되었다는 점에서, 음악에 있어서의 바로크 양식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17세기에 통주저음을 기반으로 한 음악작법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먼저 피렌체의 카메라타에 속하는 음악가들에 이어 몬테베르디, 로마 악파(L. 롯시, 카리시미, 체스티)나 베네치아 악파(F. 카발리, G. 레그렌치) 등이 나타났다. 쉿츠에서 헨델에 이르는 독일의 음악가들, 그리고 영국에 있어서의 17세기 최대의 작곡가인 헨리 퍼셀 등도 모두 오페라나 칸타타, 오라토리오와 같이 전형적인 이탈리아 풍의 극음악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이탈리아에서는 스트라델라, 코렐리, 토렐리, 그리고 비발디 등의 노력으로 소나타 독주와 트리오 소나타를 비롯하여 콘체르토와 신포니아 등의 기악 작품이 꽃피게 된다. 그리고 그 전통은 J. S. 바하를 거쳐, 그의 아들인 칼 필립 에마누엘 바하(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88)와 하이든(1732-1809)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바로크 음악의 발전을 말하기 어렵다. 바소 콘티누오는 1640년 경 뒤 늦게 프랑스에 소개되었으며 프랑스의 음악은 르네상스의 악기인 루트가 패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형성되고 있던 기악곡은 궁중 발레(ballet de cour)를 기원으로 하여 여러가지의 춤곡 리듬을 사용하였으며 류트 연주자의 레퍼토리에서 악상을 얻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 춤곡 풍의 모음곡이 이루어지게 된다. 륄리는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적 여러 요소에 전부터 내려오던 프랑스적 여러 요소를 합쳐서 르네상스 시대에서 거의 빠져 나오지 않았던 프랑스 음악을 바로크적 세계를 거의 거치지 않고 직접 이른바 고전주의적 양식으로 이끌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