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의 다양한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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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문화의 다양한 유형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인류의 역사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문화의 유형에는 농경문화, 상업문화, 유목 : 거처를 정하지 않고 물과 목초(牧草)를 따라 소·양·말 등의 가축을 몰고 다니며 하는 목축.
유목문화가 있고 이들은 주로 지리적 환경 조건의 차이에 의해서 결정 되며, 초기에는 다른 문화와의 교류나 접촉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유목문화 : 북위 50도에 걸쳐 있는 유라시아 지역과 아시아, 몽고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은 기후가 한랭하고 강우량이 매우 적어며 토지가 척박하였으므로 초원이나 사막 지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 지역의 주민들은 경제적 자원은 오로지 가축 밖에 없었으므로 기타 물품은 필연적으로 외부에서 조달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기질은 자연히 거칠고, 호전적이었으며, 자유분방했다.
°상업문화 : 지중해 지역은 여름에는 사하라 사막의 열대성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기온이 높고 건조한 ‘올리브 기후’를 나타내고, 겨울에는 대서양 저기압의 영향으로 강 우량이 많고 온난해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환경을 제공하였다. 또, 아 시아와 아프리카를 유럽에, 그리고 유럽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매개하는 통로 였으므로 이곳을 무대로 해상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교역과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상업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지중해 근처에는 이집트 문화와 메소포타미 아문화가 융성하였고, 지중해 인접 지역에 수많은 도시 국가들이 탄생하여 문 화 교류와 접촉이 더욱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상업문화는 성격상 외부 지향적 이고 진취적이었으며, 자연에 대해 항상 도전적이었다.
°농경문화 : 농경 지역에서 필요한 것은 비옥한 토지와 농사에 적합한 사계절의 기후 그리 고 관개가 가능한 물의 공급이다. 그러므로 농경문화는 기후가 온난하고 물 공 급이 수월하며 평지가 많은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사계절의 전환과 대자연의 윤택함 속에서, 농경민족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와 인내심을 배우게 되었다. 또, 이들은 정착문화의 삶과 지해를 얻게 되었다. 고정된 공간위에서 반복적인 생 활을 하는 가운데 이들의 기질은 자연히 보수적이고 온화하며 소극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과 외부에 도전하기보다는 단지 순응하고 변화를 거 부하는 내부 지향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문화의 유형은 비단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역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영토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문화 유형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중국의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기후조건이 여러 유형의 문화를 양산하기에 충분한 지리적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 교류사적으로 말하면 중국문화는 이 세 종류의 문화가 상호 충돌하고 융화하는 과정 속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북방 유목문화와 중원 농경문화의 충돌
일찍이 청대의 유학자 왕부지(王夫之)는 ‘유목’과 ‘농경‘이 라는 생활 방식의 차이로써 ‘이적(夷狄)’과 ‘중국(中國)’을 구분하였다. 그가 말한 ‘이적’은 성곽이 없고, 경작할 수 있는 논밭이 없으며, 예의(禮儀)가 없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회고 규정되고, ‘중국’은 방어할 수 있는 성곽이 있고, 경작할 수 있는 논밭이 있으며, 부과된 세금을 낼 수 있고, 혼인과 관직이 보장되는 사회로 규정된다. 농경생활을 삶의 터전으로 보았던 중국의 유학자들은 정착지 없이 수시로 이동하며, 말을 타고 호전적으로 남의 영토를 침범하는 자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중국 내륙에서 북방 유목문화와 중원 농경문화는 강우량 400mm선을 경계로 갈라지게 된다. 강우량 400mm선에 미치지 못하는 중국 서북부에는 비록 소량의 내륙 하천과 지하수를 이용한 관개 시설에 의지하는 농업 형태가 잔존하였지만, 대체로 유목경제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드넓은 하늘과 넓고 푸른 초원 위에서 소와 양을 대상으로 한 목축만이 유목민족들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 그러나 유목민족이 지닌 이동 습성은 정착지를 가지고 생활하는 농경민족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유목민족은 초목이 무성한 시기에는 대초원의 생활에 흡족해 하며 농경사회의 풍부한 자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초원의 대지가 시들고 물이 부족한 시기가 도래하면,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들은 병마(兵馬)를 동원하여 남하(南下), 부족한 물자를 약탈하여 갔다. 그들은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 긴급하게 대처하기 위하여 항시 잘 짜여진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엄밀한 조직 속에서 우두머리를 세웠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그들은 일순간에 중원 지방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력이 왕성할 시기에는 활과 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천하를 손에 넣어서 유목과 농경이 혼합된 형태의 왕조를 세웠으니, 5세기에 선비족이 황허 유역을 평정한 것이나, 13세기 몽고족이 원(元 )제국을 세운 역사, 17세기 만주족이 청(淸)제국을 건설한 역사들은 모두 유목민족의 중원 진출 역사였던 것이다.
°강우량 400mm선이 지나는 중국 동남부는 태평양과 인도양 계절풍의 영향을 받은 윤택한 지역으로서 농업 발전에 알맞은 조건을 구비하였다. 이 지역은 황허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차 농업경제 구역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물이 창조되는 지역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러나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던 ‘한족’들은 이러한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한족들은 자신들의 힘이 약할 때는 성을 쌓고 방어했으며, 힘이 강성할 때에는 서부와 북부 지방을 향한 정벌을 감행했다. 한무제 때 1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한 역사나 명 성조 때의 북벌 등은 그 실례이다. 그러나 한족은 결국 유목민족의 생활 터전을 침범하기보다는 그들과의 경계선을 공고히 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명나라 때 다시 건축된 장성(長城)의 경계선을 보면 대체로 강우량 400mm를 기준으로 하여 건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장성’은 유목문명과 농경문명을 가로지르는 상징적 경계선이 되었으며, 한족의 입장에서는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유목민족들로부터 자신들의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어선이었다.
양대 문화의 융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