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의 만세전 작품 분석

 1  이기영의 만세전 작품 분석-1
 2  이기영의 만세전 작품 분석-2
 3  이기영의 만세전 작품 분석-3
 4  이기영의 만세전 작품 분석-4
 5  이기영의 만세전 작품 분석-5
 6  이기영의 만세전 작품 분석-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이기영의 만세전 작품 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호는 민촌(民村). 충청남도 아산 출생.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중퇴하였다. 「오빠의 비밀편지」가 『개벽(開闢)』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한 이후 줄곧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활동했으며, 1931년과 1934년의 카프검거사건 당시 구속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가난 체험을 당대 현실의 총체성과 관련시키는 방향으로 열려져 있으며, 특히 집단성의 묘사에서 전형적이고도 탁월한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당대 프로문단의 최고수준으로 평가받았다.
「농부 정도룡」「민촌(民村)」「홍수」「서화」 등에서는 농촌현실의 발견과 새로운 인물유형의 창조를 통해 농민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냄으로써 사실주의소설의 가능성을 확보하였고, 이러한 작가적 역량이 내적인 성숙과정을 거쳐 종합적이고도 완결하게 표출된 것이 바로 「고향(故鄕)」이다. 이 작품은 식민지시대 농민의 형상을 전형적으로 창조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농촌현실의 구체적 형상화를 통한 삶의 총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8·15광복 이후에 그는 카프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일찍이 월북하여 북조선 문학예술 총동맹을 이끌면서 북한문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에는 「민촌」(1927), 「고향」(1936), 「서화」(1937), 「신개지(新開地)」(1938), 「생활의 윤리」(1942), 「봄」(1942), 「동천홍(東天紅)」(1943), 「광산촌」(1944), 「처녀지(處女地)」(1944), 「어머니」(1948) 등 다수가 있다.
▶ 이기영의 생애와 작품의 관련성
민촌 이기영의 생년월일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로 1893년 설을 들 수 있다. 호적부에는 1893년 5월 6일로, 덕수 이씨 족보에는 1893년 5월 16일로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는 1895년 설로 해방 이후 북한판 『조선문학개관』(1986)이나 소련판 『이기영 생애 및 저서목록』(1896)에는 1895년 5월 29일로 되어 있다. 세 번째 1896년 설은 해방이전의 『문예월간』(1932.1) 『조광』 (1940.1) 등 여러 문예지에 제시되었다. 「이기영의 생애」, 『이야기꾼리얼리즘이데올로그 이기영』(조남현 저), 건국대학교출판국,2003, pp.17-18
이기영은 태어난 곳과 고향이 다르다. 태어난 곳은 아산군 동방면 용곡리였고, 두 살인가 세살 때 천안군 천안읍 안서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다시 북일면 중암리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은 기와집이 한 채도 없을 정도로 빈촌이었으며, 중암리에서 약 2킬로미터 산으로 들어가야 나타나는 상암리 부락은 훗날 소설 「고향」을 집필했던 성불사가 있는 흑성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이기영은 11세 나던 1905년 봄에 자신을 유달리 사랑해주던 어머니를 장질부사로 여위었는데, 이는 이기영이 문학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 해에 사립 영진학교가 설립되고, 이기영은 이 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집안에 가난한 이기영은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 사이 장가를 간다. 장편소설 「봄」을 보면 이기영은 자신보다 네 살이 많은 여자와 1908년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조혼제도에 비판적이었다. 이기영은 조혼한 후 30년이 지난 쓴 「잡감수제」에서 조혼에 대해 “기이하다는 호기심을 넘어서 일종의 공분을 금치 못하게 한다”고 하면서 조혼은 “원만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게 하여 현대 조선에는 이혼사례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서화」나 「고향」에서도 나타난다. 그 후 이기영은 어떤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4년 만에 졸업했다.
그 후 이기영은 어른들 심부름으로 고대소설을 사기 위해 천안읍에 있는 서점을 다니게 되는데, 이 서점 주인인 현병주는 수봉선생으로 불리우던 한학자로 불경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던 사람이었다. 『개벽』지에 실렸던 처녀작이나 단편집 『민촌』에 실렸던 단편들도 거의 수봉 선생 책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기영은 학교 졸업 직후 숙부와 함께 유랑리로 이사했으며, 이곳 양반들의 심한 텃세로 탈향을 꿈꾸게 된다. 18세에 첫 가출을 시도했던 이기영은 그 후 방랑벽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훗날 문학을 하게 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기영은 남한 일대를 닥치는 대로 돌아다닌 끝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 예수를 믿게 되고, 논산 영화 여학교 교원으로 있었던 1918년에 친상을 당한다. 그 뒤 군청 고원을 다니다 호서은행으로 옮기고 얼마 후 1922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2년 일본에 간 이기영은 「사닌」을 비롯한 여러 서양학문을 읽었으며, 박영희의 진술에 의하면 이기영과 조명희는 일본에서 일찍이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에 가입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잠시 있다가 나오기는 했으나 이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훗날 카프 진영에 가담하게 된다.
이기영은 1924년『개벽』의 현상공모에 「오빠의 비밀편지」로 입선,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뼈저린 가난 체험을 당대 현실의 일반성에 관련시키는 방향으로 일반화하게 된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될 것은 그의 아버지가 반상을 구별하지 않는 특이한 인물이었으며, 또한 이기영의 집안이 비록 양반에 속했으나 생활자체는 거의 전부가 소작농인 상중하엄리 농민들의 그것과 동일했다는 사실이다. 이기영이 그의 작품에서 소작 농민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의식과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그들의 입장에서 농촌 현실을 폭넓게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로 인한 것이다. 1926년 프로 문단의 구심점이었던 「조광지사」사에 편집인으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펼쳤으며, 1931년 카프 1차 검거에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 났고 1934년 2차 검거시에는 2년여의 옥살이를 경험했다. 태평양 전쟁시 에는 강원도에 소재해 있다가 해방과 함께 월북, ‘북조선예술총동맹’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호웅, 「민촌의 생애」, 『이기영』(정호웅 편), 새미, 1995, pp. 14-15.
2. 「고향」 줄거리
원터마을에서 원칠이네는 부인 박성녀, 인동이, 인순이, 인학이 함께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원칠이는 동네 제사공장에서 날품을 팔고, 박성녀와 인동이는 농사를 짓고, 인순이는 동네 제사공장에 다니며 인학이를 돌본다.
참고문헌
참고자료.
권유 저, 『민촌 이기영의 작가세계』, 국학자료원, 2002.
이기영, 『고향』, 문학사상사, 1994.
정호웅 편, 『이기영』, 새미, 1995.
조남현 저, 『이야기꾼리얼리즘이데올로그 이기영』, 건국대학교출판국, 2003.
http://100.naver.com/100.php?id=125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