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작가 분석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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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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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동인은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人), 춘사(春士)이고 창씨명(創氏名)은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이다. 그의 부친은 평양교회의 초대 장로로 활동한 바 있고, 이런 연유로 김동인은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대부호의 차남(후실 소생)으로 출생한 김동인은 소년 시절을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한 것 없이 유아독존적으로 자라났다. 1921년 김동인은 기독교계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나 성격과목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중퇴하고, 1914년 도일하여 동경학원 중학부를 거쳐, 이듬해 메이지 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한다. 김동인의 도일 유학의 본래 목표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으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의 자존심과 빈번한 영화감상, 탐정소설과 문학작품 탐독으로 점차 예술, 문학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당시 그가 가장 경모한 작가는 톨스토이뿐으로, 그를 제외한 문학 특히 일본 문학에 대해서는 우선 깔보고 들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작가라 경멸할 정도였다. 1917년 메이지 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김동인은 부친 사망으로 일시 귀국, 이듬해 4월 결혼을 하나, 예술에 대한 동경과 문학에의 욕망을 버릴 수 없어 재도일, 천단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미술학교 입학은 그림을 배움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학에 대한 기초 지식과 그림에 대한 개념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김동인의 문학적 경력은 1919년부터 시작된다. 이 해 2월, 그는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함께 동인지 ‘창조’를 사재로 발간, 창간호에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한다. 3월에는 3.1운동의 파문으로 귀국, 아우 동평의 부탁으로 격문을 초하여 주었다가 출판법 위반 혐의로, ‘6개월 징역, 2년 집행 유예’의 판결을 받고 출감한다. 1921년에는 그의 대표적 단편의 하나로 쾌락주의적 인생관을 바탕으로 한 탐미주의 사상을 표현한 ‘배따라기’를 발표하는 외에 ‘목숨’, ‘전제자’등 단편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무렵 김동인은 경영난으로 ‘창조’를 폐간하며, 사적으로는 화류계 여성들과 관계를 맺으며 방탕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방탕한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작품을 발표, 1923년에는 단편 ‘이 잔을’, ‘태형’등을 발표한다. 특히 ‘이 잔을’은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그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보여주는 이색적 작품이다. 1925년에는 단편 ‘명문’, ‘감자’등 그의 자연주의적 인생관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수년간의 방탕 생활로 많은 가산을 탕진했을 뿐 아니라, 잇따른 수리사업의 실패와 그로 인한 파산, 부인의 가출과 이혼으로 인한 가정 파탄 등 겹쳐 닥치는 불행과 시련에 시달리게 되며, 정신적 고초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1928년 일시 아우 동평을 도와 평양, 진남포 등지에서 영화 흥행도 해보았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련의 수년을 지낸 후 1929년경부터 다시 창작 활동을 재개, 단편 ‘광염소나타’등과 최초의 장편인 ‘젊은 그들’을 발표한다. 1930년 재혼한 김동인은 1932년경까지 많은 장, 단편을 발표하는 바, 그 중요한 것으로는 1930년에 단편 ‘죄와 벌’, ‘배회’, ‘신앙으로’등을 발표했고, 1931년에는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 ‘잡초’등을 발표했으며, 1932년에 단편 ‘붉은 산’등을 발표했다. 특히 ‘신앙으로’는 극심한 삶의 시련을 겪은 후의 그의 신앙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며, ‘붉은 산’은 그의 민족의식을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김동인은 1933년 장편 ‘운현궁의 봄’을 발표하나, 모친 별세를 당하고 이후 불면증 증세가 악화되어 점차 강한 최면제를 복용하게 되어 약물중독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이광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작가론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우수한 평론의 하나로 인정되는 ‘춘원 연구’를 비롯 ‘나의 문단생활 30년 회고기’등을 발표한다. 1935 년경에 그의 순수 문학적 창작 활동은 현저하게 감퇴되어 ‘광화사’등을 발표, 1938년 ‘대탕지 아무머니’등의 발표가 있는 정도다. 그 후 단편 ‘김덕수’등을 발표하지만, 중풍과 정신착란증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1951년 동란의 와중에서 병사한다.
2. 김동인과 관련된 일화들
1) 횡보 염상섭과 김동인
횡보는 김동인보다 약간 뒤져서 문단에 나왔지만 조선에서 소설가로는 이광수 다음에 자기라고 뽐내던 김동인이 횡보의 처녀작 를 읽고서 강적이 나타났다고 경계하게 되었다고 김동인 자신이 고백했을 만큼 뛰어난 작가였다.
횡보는 32세의 노총각으로 18세의 김영옥과 결혼하였는데, 김영옥은 숙명여고를 갓 졸업하고 동경여자체육학교에 농구선수로서 모교의 관비생으로 유학가게 되었던 것인데 친정 부모의 만류로 그만두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훗날 김동인이 이 결혼을 주제로 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내용은 첫아들을 낳아 기뻐하는 모양을 그린 것인데 그 내용에 횡보가 의심을 품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대로하여 김동인과 절교를 선언하고 만나지 않았다. 이 사건이 한때 문단의 가십거리로 유명하였으며 그 일이 있은 지 몇 해 뒤에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동인이 먼저 껄껄 웃으니까 횡보도 껄 껄 웃고 말았다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남아 있다.
2) 김동인의 성격과 관련된 일화
잡지사에 취직한 김동인이 중절모를 쓴 채 책상에 앉아 일했다. 보다 못한 사장이 “김 선생, 사무실에서는 모자를 벗으시지요.” 한마디 했다. 김동인은 벌떡 일어나 나가더니 종내 무소식이었다.
3) 김동인의 삶과 관련된 일화
동인이 처음 평양을 거쳐 서울 출입을 하는데, 그의 거처와 행동은 마치 왕자가 아니면 부마(駙馬) 같았다. 그는 용전여수(用錢如水)하면서 여숙을 남대문 안 월편 패밀리호텔에 정하고 있었다. 당시의 패밀리호텔이란 서양 사람들만 유숙하고 있는 고급 호텔로서 조선호텔에 못지아니한 고급 호텔이다.
그는 밤에는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 명씩을 옹위시켜 밤새도록 호유(豪遊)하고, 낮에는 패밀리호텔에서 기생들을 데리고 감몽(甘夢)이 짙었었다. 월탄 박종화의 김동인에 대한 회고다(박종화, [오만한 천재 김동인의 풍류]).
3. 작품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