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의 역사1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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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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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유대 기독교 세계와 아랍이슬람세계의 대립은 전쟁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게 된다. 7세기 중엽아랍계 이슬람의 지중해 진출로부터 시작된 두 세계의 대립은 자신들의 신앙 체계의 과시와 우위선점을 위한 투쟁이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창시한 이슬람교는 이슬람 제국을 건설함으로서 거대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고대 세계 지중해는 세계의 중심이자 지중해를 장악한 사람이 세계의 패권을 잡았다. 642년 이슬람 제국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것은 지중해 세계의 정치, 문화적 현상을 영속적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신호였다. 무슬림은 카르타고를 장악함으로서 유럽세계의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슬람은 지중해 진출을 위해 봉착하여 해군력 강화에 착수했고, 이슬람제국은 시리아 이집트 함대와 튀니지에 기지를 둔 북아프리카 함대를 소유하게 됨으로서 비잔틴제국의 지중해 입지를 약화시켰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 족은 711년 카르타고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해 720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대륙으로 진출을 시작하였다. 아랍군은 부르군드까지 진출하였지만 투르에서 메로빙거조의 카롤르스 마르텔이 지휘하는 프랑크군과 전투에 패해 피레네 남부로 후퇴하였다. 이 투르전투는 유럽기독교세계를 아랍이슬람세계에서 방어함으로서 유럽기독교세계를 지켜낸 중요한 전투로 남게 되었다. 투르전투로 유럽대륙의 진출은 실패했지만 아랍군은 이베리아반도 장악에 성공하였다. 이베리아의 북부에 잔존한 기독교 소국들은 스페인의 기독교 국가 부활을 외치며 10세기부터 무슬림을 축출하기 시작해 500여년을 걸친 국토 회복운동을 실시하였다. 스페인은 카스티아 왕국의 군사 지도자인 ‘엘 시드’의 등장으로 반도 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고 1492년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에서 무슬림 퇴출하면서 십자군 운동을 성공하고 이베리아에 기독교 세계를 부활 시켰다.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프랑스 남부까지 아랍인 해적들이 창궐했는데, 이들은 유럽인들을 대륙으로 고립시켜 중세유럽이 폐쇄적 봉건 사회화 되는데 일조하였다. 벨기에 출신 경제 사사가 ‘삐렌느’는 이슬람제국의 진출이 지중해 문화의 근본을 무너트려 유럽을 자급자족 상황으로 만들어 중세시대로 전환하는데 영향을 줬다고 주장했다. 유럽세계는 11세기에 이르러 아랍세계에 빼앗긴 지중해 패권 장악을 위해 십자군 원정에 발의하게 된다.
2. 유럽 기독교세계의 대반격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유럽세계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장하였고, 교황권의 영향력도 강화되었다. 소아시아를 장악한 셀주크 투르크 족이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창건하면서 유럽기독교도의 성지순례와 동방무역을 방해하고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당시 교황 우르반 2세는 기독교 세계의 통일이라는 야망을 가지고 셀주크 투르크의 유럽 기독교인에 대한 태도와 비잔틴제국의 원조요청이라는 명분하에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다. 십자군 원정은 1096년에서 1291년 까지 8차례 원정을 했지만 1회 원정군만 성공하였다. 십자군원정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을 뿐더러 무장도 안 된 병졸들과 먼 거리의 원정에 지휘부의 갈등으로 원정 실패로 이어졌다. 또한 종교적 대의로 시작된 원정은 동방물산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점차 상업적으로 변질되었으며 지중해를 유럽의 활동무대로 삼아 이슬람교도의 기독교 세계 적대 의식과 증오감을 증대 시켰다. 십자군 원정으로 미미하게나마 동서양의 융합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원정군 모집 시 물질적 욕망과 이국여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참전한 전사가 많고 보급물자의 부족으로 1차 원정부터 약탈과 살육 등의 만행이 이뤄졌다. 특히 십자군역사상 가장 추악한 십자군으로 기록된 4회 십자군의 비잔틴재국 침공은 결국 비잔틴의 멸망에 일조하였다. 십자군은 영적문제를 무력에 호소하여 점차 물질적 세속적으로 변화한 부작용을 남긴 전쟁이지만 이상주의, 신앙, 영웅주의의 발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무슬림의 비잔티움과 발칸반도 정복을 지연시켰고 처음으로 기독교를 유럽이외 지역에 확산시켜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진보를 촉진했다는 평가도 있다. 아랍의 지적, 문화적 창조력이 서양으로 옮겨가 약 1백 여년 후 근대 르네상스 문화의 초석이 되었다. 십자군 원정 이후 오스만 투르크족이 성장하여 이슬람 세계에 등장하여 기독교세계가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3. 이슬람 세계의 재공격
13세기 말 경제침체와 정치 불안정 등에 불만을 가진 그리스계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오스만 투르크가 비잔틴제국에 진출했다. 오스만투르크족은 그리스인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그리스인과 융합을 이루었다. 한동안 티무르의 서진이 오스만투르크를 패퇴시켜 오스만투르크의 비잔틴제국 위협이 중지 되었으나 곧 쇠약해진 티무르제국으로 인해 오스만투르크의 위협이 재기되었다. 서유럽은 비잔틴에 새로 십자군을 파견했으나 비잔틴제국을 구할 수 없었고 헝가리도 교황청과 십자군을 동원했으나 바루나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1452년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틴제국의 항의를 무시하며 마르마라 해협의 유럽 쪽 해안에 성체를 제작하였다. 서구기독교 세력은 비잔틴제국의 지원 간청에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 통합을 제안하여 비잔틴과의 교섭이 결렬 되었다. 또한 유럽세계도 혼란한 상황이어서 도와줄 입장이 되지 못했다. 베네치아만이 비잔틴황제의 요청에 해군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1453년 5월 29일 비잔티움성이 결국 함락되고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제국 멸망 후 천여 년을 버티다 멸망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틴인의 생명과 종교자유보장을 약속하고 자신이 기독교교회 보호자임을 선언하여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비잔틴 황제의 계승자로 받아들었다. 그리고 비잔티움을 이스탄불로 개칭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4. 가톨릭교 신성동맹과 오스만 투르크제국 응징
14세기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반도로 쇄도를 시작하여 비잔틴을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의 발칸반도 확장정책을 계속했다. 투르크족의 관용정책과 적은 세금, 활발한 건설사업 추진으로 주민들에게 생활적, 경제적 이익을 줌으로 발칸지역의 진출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또한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미치던 헝가리가 정치 불안으로 오스만 투르크에 번번이 패하면서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술래이만 1세는 1526년 헝가리로 진격하여 대공세를 펼쳐 모하치평원에서 대승을 거두어 유럽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지중해에서도 투르크제국은 강세를 보였고 1529년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하는데 이르지만 전투를 중단하였다. 1533년 휴전 교섭이 시작되어 헝가리는 투르크에 제국으로서 예우와 공납을 약속하며 전쟁은 중지되었다. 발칸 반도는 복잡한 종교와 인종간의 대립으로 제 1차 대전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는데 이분쟁의 뿌리는 오스만투르크가 발칸반도를 장악하였을 때부터 심어졌다.
16세기에서 17세기 유럽은 종교분쟁으로 인한 혼란스러웠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해 신교도와 구교도의 대립이 이뤄져 싸움이 빈번히 일어나 정치 사회적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교역에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는 피우스 5세에게 대 오스만 투르크 십자군을 제의 했고 당시 종교개혁이후 프로테스탄트에 골치를 앓던 교황은 가톨릭교의 교세의 유지와 확장하고 이슬람세계 응징으로 기독교세계의 대의를 재천명할 기회로 여겨 1571년 교황청, 스페인, 베네치아의 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1571년 레판토해전에 오스만제국에게 대승을 거두어 신성동맹은 큰손 실없이 유럽가톨릭교의 대승리를 이뤄냈다. 그러나 그 이후 신성동맹은 내분으로 무산되었고 이어 교황이 타계하며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투르크에 양도하는 조약을 맺었다. 레판토해전은 장기적 이익은 미미한 승리였지만 심리적 도덕적으로 의미가 큰 사건으로 투르크족에 대한 공포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17세기 까지 동지중해를 그들의 활동무대로 삼았고 해전 후 신성동맹은 약화되어 투르크족의 부흥의 기회를 주었다. 사실 오스만 투르크족의 유럽정책에 제약을 준 것은 레판토해전보다 페르시아의 도전이었다. 19세기 쇠약해진 오스만은 1차 대전 때 독일의 편을 들었으나 종전 후 해체되어 현재 터키가 되었다.
5. 이슬람세계와 기독교 세계의 발칸반도에서의 재격돌
오스만 투르크에 지배받던 그리스는 1814년 ‘필리키에타이레이아’라는 비밀결사 조직에서부터 독립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적극적 행동의 필요성을 느낀 그리스 인들은 몰다비아에 공격을 시작하면서 오스만제국과 투쟁을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후원을 기대했었으나 없자 실망감을 느낀 그리스인들은 독립운동 조직 확대로 승화시켜 보다 활발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 독립 투쟁 중에 그리스인의 투르크인 학살과 그에 대한 오스만 투르크의 그리스인 보복 학살이 번갈아 가며 이뤄졌다. 유럽제국에서는 ‘친 그리스 운동’이 일어나 각국의 의용군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문인이나 예술가의 지원도 활발히 이뤄졌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822년부터 1824년 사이 독립운동 분쇄를 위한 대공세를 기도했으나 정부혼란으로 지연되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계속된 패전으로 점령지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 내분과 오스만제국에 대한 이집트의 지원으로 힘겹게 영토를 유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개입으로 1827년 10월 20일 나바리노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1830년 2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의정서에 서명으로 그리스의 완전독립을 유도하고 마침내 1832년 5월 런던회의에서 그리스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게 되었다. 그리스 독립 후 그리스와 오스만 투르크는 서로 적대관계로 대립과 충돌을 반복했다. 사브레 조약을 계기로 1921년 그리스-터키 전쟁이 시작되어 1922년 10월 무다니아 휴전조약과 1923년 로잔느 조약으로 분쟁의 요지였던 그리스의 국경 문제를 확정짓고 양국 간 분쟁의 소지를 감소시켰다. 1960년대 이후 다시 그리스와 터키는 에게해 관련 분쟁이 심화 되어 결국 키프로스에서 대립으로 이어졌다. 키프로스 사태는 복잡한 인종- 종교 문제와 그리스와 터키의 적대관계로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그리스계와 터키계 자치단체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키프로스 대통령의 헌법개정시도로 발생하였다. UN의 중재와 재충돌, 다시 재중재를 거듭하면서 그리스와 터키의 축소판인 키프로스는 아직까지도 완전한 해결은 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