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시대 주희, 유청지가 편찬한 책으로 1187년에 완성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보면 주희의 조국 송나라는 금나라에 밀려 남으로 넘어온 상황이었고, 그런 국가적 위기에서도 선량한 풍속은 쇠퇴하고 어진 인재는 나오지 않은 채 서로 자기의 이익만 따지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주희는 자라나는 어린 후
남송의 대가인 마원 · 하규의 화풍을 본받은 데 불과하여 새로운 맛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송화의 영역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화풍의 경지를 연 화가로 조자앙이 있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여기인데, 그럼에도 전문화가에는 없는 자유스러운 경지로 화필을 전개하여 뒤에 가서 문인화가 일어나는
남송 대에 주희(朱熹)에 이하여 성리학이 완성되면서 유교도 심오한 철학체계를 갖춘 종교적인 색체를 띠게 되었다. 그것이 고려후기에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불교위주의 국가 이념을 대체하게 되었다. 고려말의 신흥사대부라고 부르는 계층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새로운 시대 이념으로 수용하여 여
산대(山臺)놀이.나희(儺戱).노오(能)이다. 후자는 각각 세 나라의 대표적인 가면극이다.
중국에서는 나례에서 연행되던 산악 계통의 놀이들이 발전해 송대(宋代) 특히 남송(南宋)시대에 가면극인 나희(儺戱)가 성립되었다. 나희 가면극은 현재도 귀주성과 운남성 등의 여러 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다.
Ⅰ. 서론
몽고족은 일종의 카스트제도와 같은 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다수민족인 한족의 불만을 크게 샀다. 즉 그들 자신을 최정상에, 주로 서역계통의 이민족인 이른바 「색목인」을 두 번째로, 그리고 몽고제국에 먼저 복속한 북부지방의 한족을 세 번째, 최후까지 저항한 남송지역의 한족
Ⅰ. 서론
원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더니 고기를 놓고 서로 다투어 먹어 승부를 겨루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고기를 즐겨 먹는 몽고인의 육식전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몽고의 식생활에 관해서는 남송 말기에 몽고의 사신으로 갔던 팽대아(彭大雅)의 흑달사략에 상세히 기록
남송(南宋)의 주희가 「논어」, 「대학」, 「중용」과 함께 사서(四書)의 하나로 삼음
仁義→여민동락 사상&성선설
- 仁<義
- 공자의 仁이 맹자에 의해 義의 개념으로 계승
- 仁: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
- 義: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
- 義의 내용을 구
1. 여몽전쟁
ⅰ. 역사적 배경
무신정권 전기에서 최씨 정권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몽골은 유라시아 대륙을 정벌하고 있었다. 서역원정을 완료한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중원의 금나라를 침공하였다. 이때 도망쳐나온 일부 거란족들이 대요국(大遼國)을 건국해, 여진족을 포섭하여 몽골에 대한 복
남송사회의 현실을 참고하여 이른바 '주자증손여씨향약'으로 만들고 '월단집회독약지례'(月旦集會讀約之禮)를 덧붙였다. 이것 역시 그대로 '여씨향약' 또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이라 불렀다. ‘주자대전’과 ‘소학’에 실려 주자학의 수용과 함께 우리나라에 소개된 향약은 일찍부터 사족들 사이에 행
남송․원의 양식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고려 말기의 화풍을 계승하여 새로운 안견파(安堅派) 화풍이 형성되었다. 넓은 공간개념, 삼단구도법, 농담의 대비가 심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는 안견파 화풍은 중기 화단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수묵화 발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