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갈등 현안
중국 또한 우리와 역사적인 배경에서 유사하여 일본과의 오랜 앙금이 남아있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문제와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 정치집단에 대한 반감과 댜오위다오 섬 영유권 분쟁은 근현대사에 있어서 중일간에 이어져 온 오랜 갈등문제이다. 최근에는 미중
일본군과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의 강화를 획책하였던 사건’ 이라는 것이 전부 일 것이다. TV든 영화든, 소설이든, 명성황후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만 했지 우리나라 국사 책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다루지 않고 있다. 단지, 근현대사 속에서의 조선을 설명할 때 잠시
Ⅰ. 한국근현대사와 운요호사건
1875년(고종 12년)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경기만에 불법으로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강화 수비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 강화도 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굳게 지키자 일본은 무력으로라도 문호를 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군함을 보내어 먹을 물을 구
핵심에 통리기무아문 당상 이재긍과 민비의 친조카 민영익 그리고 이조참판 홍영식 등이 여기에 가세함으로써 開化政策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다시 집권한 민씨 躑躅은 특별한 정견도 없이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급구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自主獨
I.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의 일본과 미국
1. 일본일본은 근현대사 부분에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독특한 역할을 하였다. 소위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도 불릴 수 있는데 이에 관하여 워싱턴 체제 전, 후의 일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워싱턴 체제 전의 일본은 우선, 1800년 대 중반
일본을 통해 굴절되어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되었고, 그 상태에서 20세기 전반의 우리 역사가 흘러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근대시기에 대해 말할 때, 서구화와 식민지화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한국에서 근대의 기점을 언제로 잡을 것인가를 두고 학자 들 간의 합의가 이
일본 관동군참모로 하여금 만주점령을 기도, 봉천 교외 유조구의 만철 철도를 파괴케 하였다. 관동군사령관 목장번은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 질타하고 총공격을 명하여 마침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청의 폐제 부의로 하여금
「만주국(滿洲國)」이란 괴뢰정권을 수립케 하였다(1932년 3월). 이에 중국
일본의 교과서에 보이는 역사왜곡 문제, 독도의 영유권에 관한 일본의 외교적 쟁점화 시도 등의 사안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역사 내지 (한)국사의 교육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강력하게 제기된 바 있다. 이장에서는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의 문제점과 대책방안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기로
근현대사의 가장 민감한 대목 중 하나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된 지 18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본격 사업에 착수한 지 8년이 지나서야 사전이 나온 것만 봐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민감한 사안임은 물론 친일인명사전 발간 논쟁이 찬반 진영 간 날선 대립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일본에는 여러 정치인, 언론인들에 의해서 서구 열강들로 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희생 제물로 삼을 수 밖에 없다는 여론이 형성 되었다.
여기까지
제임스 L. 맥클레인,『일본근현대사』,
이경아 역, 2004, 다락원, pp 384-390 참조.
2. 경인선 철도의 건설 과정
일본이 최초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