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집권파 인사들에게는 위험시될 수밖에 없었고, 개화당은 곧 경계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집권 척촉 세력과 개화당 사이의 이러한 불신과 대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어 갔다. 특히 보방사 민영익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귀국하는 1884년 5월 이후로 개화당은 일방적으로 불리한
일본과 청의 내적 변화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였다.
일본군과 청군이 제각기 자국의 이익과 관련해서 우리나라로 들어오자 민씨 척족세력과 개화파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청군의 힘에 의지하여 대원군세력을 밀어내고 하층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결국 외세에 의지하여 정권을
정책에 반발하는 구군인층 및 도시빈민층의 불만이 폭발한 임오군란과 청의개입으로 인한 내정간섭은 개화파의 입지 및 정치적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 황에서 개화파가 1884년 시도한 정치적 변혁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겨울 김옥균, 박영효, 홍 영식 등의 개화파들은 자신
일본정부의 시해관련 부분을 언제나 구명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다. 물론 우리 학계에서도 이런 몇 분의 선구적인 연구가 있었으나. 대개 논증으로 그쳤고 아직 사건의 핵심인 일본정부의 관련을 실증적으로 구명해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사건의 핵심을 밝히지 못한 일차적인 원인은 물론 일
결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는 답으로 종착되었다.
1880년대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서로 침략과 침탈을 일삼은 제국주의 시대였다. 이것은 비단 서양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이다. 주변 열강들에 둘러싸여 개항할 것을 요구 받았고, 이러한 열강들의 개항에의 요구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