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이후 다시 집권한 민씨 躑躅은 특별한 정견도 없이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급구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自主獨立이 크게 침해되고 있었다. 반면 청은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킨 상태에서 민씨 정권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1876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맺은 조선 최초의 근대화 조약이자 불평등조약 (해안 측량권, 치외법권 허용).
1882
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 修好 通商 條約)
청의 알선으로 미국과 맺은 조약 (치외법권, 최혜국대우 규정).
1882
임오군란(壬午軍
조선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이후 조선에 진출하였다. 1882년 최초의 반일운동인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공사관 주둔병의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주병권을 장악하고, 1884년에는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를 후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오히
강화도조약 때에는 개항불가론을 폈다. 또한 내부적으로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으로 일본세력과 개화반대 등을 주장하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위정척사파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반침략적 민족의식으로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이러한 의병운동은 농민운동과 위정척사사상의 영향을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또다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정책변화를 알리는 이노우에 외상의 밀서가 창덕궁에서 청군과 접전을 하고 있던 다께조에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고 따라서 일본인 모두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용구 310p)
한성조약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