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와 수구파는 1898년 절영도의 러시아 조차 문제로 격돌하였다. 조차가 침략의 첫 단계라고 생각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절영도 조차 요구에 반대하고 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 한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양국은
독립협회는 자주적 수구파와 연합하여 친러 수구파의 반대를 이겨내고 1897년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환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결과로 조선은 1897년 10월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조선이 ‘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주변국인 청나라, 일본을 비롯하여 서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독립협회는 창립되었다.
독립협회의 창립은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많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독립협회가 주로 상류층에 속하는 신 지식층을 중심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 계몽 운동과 민의(民意)를 정치에 반영하도록 하는 등 아래로부터의 개혁에도 많은 힘을 기울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사상은 인권의 자유와 평등 및 인민주권의 확립을 통해 인권·민권을 보장하고,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국권을 수호하여 근대적 국민국가의 수립을 추구한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 천부인권론에 입각한 자유권을 주장하였다
•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보장을 주장하
것이 강행되자 10월 1일 부터 12일간 민중투쟁 전개 , 의회설립과 7대신의 파면 요구
친러 수구파 정권이 붕괴하고 박정양, 민영환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정부의 출범, 독립협회와 정부 의회설립협상
조규2안 체결
독립협회의 정치세력화가 구체화
기득권이 보장되는 방식의
의회설립추구
2) 개화 사상에 눈을 뜨다.
김옥균은 철종(哲宗) 재위 2년(서기 1851년)에 충남 공주에서 호군 김병태(金炳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은 그의 얼굴이 백옥 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김옥균은 여섯살 때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冀)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서 나타난 일본군사력에의 의존을 탈피함으로써 개화=‘왜이화‘라는 기존의 관념이 민중 사이에서 점차 지양되어 개화사상의 정치적 지향이 주로 도시중심이라는 지역적 제약은 있었지만 점차로 올바르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관련되어있다.
, 홍 영식 등의 개화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여 세운 우정국의 낙성식 연회를 이용하여 정치적 변혁을 단행하였다.
즉, 그들은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閔泳翊)을 살해하고 왕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개혁정치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객관적 조건은 청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