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대립 =>신라 항복, 후백제 정벌=> 후삼국 통일(936), 발해 유민(발해멸망:936) 포용
=>∴ 왕건의 후삼국 통일
(3) 고려 건국의 의의
6두품출신과 호족을 중심으로 성립
=> 골품제위주의 통일신라 사회보다 개방적
과거제 실시, 효율성과 합리성 강화
유교정치 이념 수용
2) 주요 정책
(1) 북진정책 표방-
백제에 대적할만한 힘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가야를 정복하면서 가야계 왕족과 귀족 그리고 가야계 유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신라는
이러한 불만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
(김유신의 증조부)의 후손들을 진골 귀족으로 편입시켜 가야인
들의 반발을 희석했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
과 같은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발판이 된 이즈모계(出雲系) 신화와 고대 한국에서 전승되었을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과의 민족적인 융합정책이 최우선과제였는데,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로서는 그리 쉽게 신라에 융합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삼국은 실제로 7백여 년간이나 서로 사직을 달리하면서 자기들의 사회·문화적 전통을 유지해왔다. 그래서 서로 다른 자국민의식과·국계의식(나라 계통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은 고되게 논산땅과 부대낀다. 황산벌에서 신라 5만 군사의 손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백제 계백 장군의 묘가 있는가 하면, 그로부터 수 백년 뒤에 후백제의 기치를 걸었으나 고려에 투신하고 만 견훤의 묘도 이 땅에 있어 백제유민들의 가슴 아린 사연을 되돌아보게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학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의 천문학, 역산학(曆算學)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쯤 나라 시대로 접어든 일본에는 천문, 역산, 복점을 담당하는 음양료(陰陽寮)가 설립되었는데, 이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들은 모두 백제유민들이었고 8세기 이후에야 일본인들이 이를 배워 계
유민이 된 고구려나, 백제의 유민들까지도 이 ‘재당신라인’에 포함 시키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 사람들이 나는 백제인이야! 혹은 고구려인이야! 하는 아이덴디티(ID)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나라 사람들은 그들은 신라인이라고 보고 역사서등에 기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통일 이
백제 사람을 가르켜 百殘이라 한 것은 백제놈이라는 멸시적 감정 표현이고 김유신은 고구려를 國之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도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다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자 고구려와 백제유민은 신라에 대항하였고 적개심을 불태웠다. 이는 후삼국시대에 뚜렷하게 나타
차례
1. 비상 (碑像)
2.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3. 명문으로부터
4. 달솔(達率) 그리고 대내마
5. 백제 부흥을 위해
6. 미륵, 아미타
7. 백제유민의 숨결, 아미타삼존불비상
1. 비상 (碑像)
불비상? =불상 + 비상
=불석상+ 명문
중국 (당나라)의 영향 多
계유명아미타삼
작가 문순태
전라남도 담양 출생
19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농촌중보]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선다.
1965년 『현대문학』에 천재들로 추천받아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고, 1974년 『한국문학』에 백제유민의 한을 그린 단편 백제의 미소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