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과 국교를 회복했다. 그러나 정도전 등 신진세력의 압력으로 차츰 친명정책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1388년 명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하자 집권자였던 최영은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신흥사대부들과 연결하여 친명의 입장에 섰던 이성계일파는 이에 반대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사대부라고 하는 신진유신세력이 추구하는 노선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두 세력은 협력관계를 맺게 되고, 결국 그들에 의해 고려왕조는 몰락하고 유교이념에 입각한 조선왕조가 성립하였다.
조선의 국가체제 이면에는 신유학인 성리학이 지도이념으로 등장하여 통치철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유
성리학을 신봉.
→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 건국.
→ 당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한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과거가 비중이 컸지 만, 이것은 사대부들 말고는 다른 신분집단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2. 조선 시대의 학교교육
고려 말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칠 무렵, 그리고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여러번의 권력 교체가 있었다. 권문세족과 무인세력, 신진사대부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얽히고 섥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여러 사건 사이사이에 여러 세력이 어떻게 도퇴되었으며, 그리고 마지
고려시대 향리연구 / 박경자
이렇게 향리계층이 과거에 진출하는 비중이 늘어난 이유에는 무신정변 이후 낙향하는 관인층으로 인해 지방교육이 발전했고, 이는 과거를 준비하는 향리들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되겠다. 고려시대 향리의 신분에 대하여/ 김옥규
무인 집권자들
고려 노래들은 그 노랫말이 비리(鄙俚), 망탄(妄誕)하고 남녀상열(男女相悅)의 내용을 담았다고 해서 삭제되고 변개되었다. 조선 초 성리학적 이념을 준거 로 하여 고려의 속악을 수용하다 보니, 국가 의식에서 연주된 「정읍사」,「처용가」,「정과정」,「동동」등 4편만이 『악학궤범』에 남아있고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권문세족(權門勢族)과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대립국면으로 설정하고 권문세족의 친원적(親元的) 태도나 불법적으로 농장과 노비를 증대시키며 정치 질서를 문란케 한 사실을 비판하면서 새로 등장한 사회세력이 신진사대부였다는 인식은 거의 일반화된 것이었다. 이에 따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반몽개혁 의지를 담은 많은 사서와 민족의식을 높일 수 있는 역사책들이 편찬되었다. 또한 고려 문화는 원과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무엇보다도 성리학의 수입은 무인집권시대에 위축되었던 유교문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계기가
유교 문화권의 농본주의 사상은 사회 구성원을 지배하는 사상으로써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사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사(士), 즉 사대부들 다음으로 중시되었던 것이 농(農), 즉 농업과 농민이었다. 또한 유교에서도 인간의 근본이 토지라고 주창하고 있다. 금장태,
(2) 조선시대의 인물화 경향
조선의 미술활동은 고려와는 달리, 유교생활에 바탕을 두고 양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건축․공예․서화의 작품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매우 잘 조화시켜 자연미를 살리면서 고상하고 기품이 있었다. 또한 민족문화가 고양되면서 예술활동도 주체적이고 개성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