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반정을 통하여 조선 후기시대는 오히려 역사의 퇴보를 자초하였다. 인조는 반정의 일등공신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조선시대 왕 중 3번이나 파천하는 굴욕과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에 정묘, 병자호란을 불러와 조선인 약 45만명이 청으로 끌려가 노예
난정, 보우 등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이 그의 주변에 동시에 등장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조선시대 여걸의 대표주자라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신병주,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6.25. P122
(2) 문정왕후 간택 당시의 배경
문정왕후가 간택 될 당시는 중종을 보위에 올린 반정 공신들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후 김류(金) 계열과의 연합을 통한 반정이 성공하자 이조좌랑이 되고 그 해에 이조참판과 비변사 제조까지 승진하였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녹훈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에 공헌하고, 1632년(인조 10) 이후 예
난
중종반정
위와 같은 왕위에 오른 과정의 차이점은 훗날 두 왕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렇다면 먼저 태종과 중종에 대한 간략한 인물 설명과 함께 그들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대한 핵심적인 특징, 그런 리더십이 나오게 된 가장 큰 영향을 준 왕위에 오르게 된 과
난 90년 6월에는 명명 문제만을 놓고 학계의 대규모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아직까지 일치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상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에 처음 부여된 이름은 '동적(東賊)의 난(亂)', '동학배(東學배輩)의 난', '동학비도(東學匪徒)의 난', '동학도당(東學徒黨)의 난', '동학비란(東學匪亂)', '동학
난(亂)하던 데로 저들끼리 서로 난(亂)하니 난우난(亂又亂)이요, 원(元) 교회 양(羊)을 도적하던 방법대로 저들끼리 서로 도적하니 적지적(賊之賊)이다. 일인 일대(一人一代)에 두 교파 창설.” 김인서, “일인 일대에 두 교파,”「신앙생활」(1937. 12),
함남 원산에서 형성된 신비적 신앙체험 그룹이었던
난을 자초하였다. 또한 묘청(妙淸) ․ 백수한(白壽翰)의 음양설(陰陽說)을 혹신(惑信)하여 결국 묘청난(妙淸亂)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하여 왕권의 쇠약이 가속화되므로 하극상(下剋上)의 풍조가 조장되어 무인의 난과 지방의 동란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불교와 왕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교
난을 자초하였다. 또한 묘청(妙淸) ․ 백수한(白壽翰)의 음양설(陰陽說)을 혹신(惑信)하여 결국 묘청난(妙淸亂)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하여 왕권의 쇠약이 가속화되므로 하극상(下剋上)의 풍조가 조장되어 무인의 난과 지방의 동란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불교와 왕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교
귀안(歸雁)
보 왯 萬里(만리) 옛 나그네
亂(난)이 긋거든 어느 예 도라가려뇨
江城(강성)에 그려기
너피 正(정)히 북으로 라가매 애 긋노라
春來萬里客 춘래만리객
亂定幾年歸 난정기년귀
腸斷江城雁 장단강성안
高高正北飛 고고정북비
봄에 와 있는 만 리 밖의 나그네는
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