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수행과 학문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더욱 타락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국사가 태어나기 바로 전의 시대만 하더라도 인종(仁宗:1122-1146)은 훌륭한 내치로써, 유학과 문학을 진작하고 그 스스로 검약(儉約)과 소박(素朴)한 생활을 하였으나 외척(外戚) 이자겸(李資謙)에게 권력을 맡
국사는 의종(毅宗) 12년(1158)에 태어나 희종(熙宗) 6년(1210)에 돌아가셨다. 4대에 걸쳐 불과 52년이라는 짧은 주세 기간이었다. 그러한 이 시대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안정과 평화가 유지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과 변화의 소용돌이가 연속되고 있던 시대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불교의 수행과 학
불교가 바로 되었는가 아니면 잘못되었는가 하는 본질적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지눌스님에 대한 성철 스님의 비판으로 야기된 이 돈점 논쟁에서 궁극적인 대립 논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성철 스님이 지눌스님의 돈오점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근저에는
Ⅰ. 머리말
무신집권기의 고려불교계는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이에 대한 개혁 의도에서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 우선 지눌불교의 역사적 위치를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定慧結社의 창립과정이나 불교사상, 나아가 수선사의 성립기반과 사회세력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지눌 이후의 수선
마음의 원천에서만 모든 대립된 이론과 쟁론을 스스로 쉬면 선(禪)ㆍ교(敎)의 대립 또한 근원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로서 지눌이 겪어야만 했던 고려 중기의 격심한 사회 변동과 그가 몸 담았던 고려 불교계의 여러 문제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