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종교사] 한국기독교신흥종파의 시원- 백남주, 김백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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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기독교신흥종파의 시원: 백남주, 김백문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며
한국기독교의 신앙 지도는 민족적인 불운의 역사와 함께 간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 지도자들의 신앙적인 돌파구는 신비주의로 이어졌다. 또 6.25 전후의 혼란기에 신비주의자들은 산을 찾아 기도할 때 하나님과 영적인 교감을 느낄 수 있다고 신비적이고 미신적인 방법으로 구도자들을 이끌었다. 요즘 한국의 기독교회 안에는 영성이라는 단어가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 전통에 영성이 있어왔다는 예를 여러 가지로 드는 가운데 영성기도, 산기도 등을 통한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예전의 신앙방법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령 사경회, 부흥회, 영성수련회 등으로 이름은 달라지고 있으나 오랫동안 신비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예전의 방식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한국인 고유의 종교적 특성을 반영하는 무속적인 신비주의 영성운동의 내용을 담고있다.
본고에서는 1930년대 신비주의 운동으로 예수교회가 분열되는 사건의 중심에 있던 백남주와 1950년대의 김백문의 책을 통하여 나타난 세가지 원리를 봄으로써 오늘의 한국기독교와 신흥종파에 미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2. 원산파와 백남주
1930년대에 우리나라의 기독교회 안에는 광적 신비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민족과 기독교회는 일본의 제국주의 아래 갖은 핍박과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일부 기독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신앙적인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을 산과 들에서 기도함으로 이루려고 하였다. 이러한 신앙운동은 지나친 광적 신비주의 운동으로 이어진 경우가 생겨나게 했다. 박영관, 『이단종파비판』 (서울: 예수교 문서선교회), 1981, 25-27.
1927년 원산의 유명화라는 여인의 신비주의 운동은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녀와 이용도 목사와의 일화는 유명하다. 박영관, 위의 책, 26. 이용도 목사는 원산에서 유명화의 설교를 듣던 중 그 여자의 말소리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여기고 유명화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라고 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런 예로 신비주의 운동자들은 기존교회와 다른 길을 택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 가운데 백남주는 원산파의 주축이었다. 그는 평양 신학 출신의 수재로 알려져 있었다. 백남주에 대해서 김인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백남주는 평양 신학 출(出)의 수재로 유명화, 이유신, 입류녀를 빙(憑)하여 신탁(信託)을 칭하고 이용도, 이호빈 등과 모(謨)하여 『예수교회』란 일파를 신설할쌔 제 손으로 소위 신전 헌장을 초하여 조직을 다한 후에는 여도(女徒) 김정일과 동거하는 때문에 제 만든 파에서 나와서 다시 철산 김성도란 새 여주를 중심인으로 하고 『성주교회』를 설(說)한 바 이호빈 파의 교인을 많이 데리고 나갔다. 원(元) 교회를 난(亂)하던 데로 저들끼리 서로 난(亂)하니 난우난(亂又亂)이요, 원(元) 교회 양(羊)을 도적하던 방법대로 저들끼리 서로 도적하니 적지적(賊之賊)이다. 일인 일대(一人一代)에 두 교파 창설.” 김인서, “일인 일대에 두 교파,”「신앙생활」(1937. 12),
함남 원산에서 형성된 신비적 신앙체험 그룹이었던 원산파는 인위적인 조직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기, 이웃, 사제지간 등의 관계로 얽혀 있던 이들은 처음에 가정집회 형태의 소규모 집회로 시작하다가 점차 공통적인 체험을 하면서 나름대로 특유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예수교회 항목,” 『기독교대백과사전』11, 864.
이들의 신앙공동체는 체계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원산파의 시작 연도에 대해서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1932년보다는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룹의 중심 인물은 마르다윌슨여신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유명화(劉明花)와 백남주(白南柱), 그리고 장로교 조사 한준명(韓俊明) 등이었다. 이후, 이들은 1933년 1월 3일 “예수교회”를 창설하는데 주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예수교회 항목,” 『기독교대백과사전』11,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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