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과 쿠리아 민회의 권한이 회복되었다. 아직까지 이 무렵에는 행정을 담당하는 직책이 전혀 없었다. 유력 가문들은 결국 콘술(consul)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에게 특별한 권력을 부여하도록 결정하였다. 로마인들이 두 명의 콘술(집정관)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히 전제정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두 사
원로원은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본인의 승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루비콘강을 건너서 로마로 진격한다. 급박해진 원로원은 로마의 명장 폼페이우스를 앞세워 카이사르를 공격하려 했으나 카이사르의 뛰어난 전략에 결국 패배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를 쫒던
원로원을 제친 경제적인 과실
->당시 로마인들의 부의축적에 관한 사고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기사의 활동분야는 원로원 귀족들에게 혐오할 만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영리추구의 행위를 대수롭지 않거나 명예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로마의 귀족들이 영리추구를 전혀 도외시한 것은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하며 농지법 실행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동료 호민관 옥타비아누스를 면직시키고 자신의 동생과 장인이 아피우스 클라디우스를 구성으로 하는 농지분배 3인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는 평민회를 통해 페르가뭄 왕국의 아탈루스3세가 왕국을 유증함으로서 얻은 이익의 일부를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하며 농지법 실행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동료 호민관 옥타비아누스를 면직시키고 자신의 동생과 장인이 아피우스 클라디우스를 구성으로 하는 농지분배 3인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는 평민회를 통해 페르가뭄 왕국의 아탈루스3세가 왕국을 유증함으로서 얻은 이익의 일부를
원로원 가문들에 의해 기원전 5세기 초에 형성
에트루리아인 왕들의 치하에서 기병으로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기사귀족들(사회적으로 지주계층)에서 기원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함
어쨌든 일단 형성된 귀족층은 혈통에 의해 그리고 그들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담당한 기능
원로원의 보수파)에 맞서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폼페이우스의 밀접한 관계는 그후 그의 정치활동의 요체가 되었다. 그가 기원전 64년과 63년에 콘술로 선출된 것은 그의 경쟁자인 카틸리나이 혁명사상을 두려워한
원로원 귀족의 구성원에서 나올 수 없었다. 그 일 자체가 고도의 전문적인 공공계약의 실무와 관련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기능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영리추구의 활동을 ‘명예롭지’ 않게 여겼던 원로원 귀족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종이었기 때문이다. 자연 그런 분야에 진출하게 된
1. 초기 : 귀족적 공화정
-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인(人) 왕의 압박이 심해졌을 때, 왕을 국외로 축출하고 공화제를 수립.
- 원로원을 중심으로 제한된 소수 귀족들이 집권하는 이른바 귀족과두제에 의한 공화정.
- 평민들이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정권을 갖지 못했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