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합리주의와 역사비판
일반적 상황
기독교의 전통이 계몽된 근대의 이성과 만났을 때, 양자간의 모순을 극복해야 할 신학적 과제가 새로이 등장했다. 18세기 말까지 급속하게 발전되어 온 계몽주의적 사조는 유럽의 과학과 철학을 규정하고 기독교 사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학은 두 방
교회는 하나님이 특별하신 계획에 따라 불러 주심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또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을 수행하기 위한 모임임을 알 수 있다. 또 성경에서 "카할"이란 말과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쓸 때 교인들이 모이는 어떤 건물을 의미한 적은 없다. 도리어 모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를 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므로 교회가 교회된다. 이 연합은 성령께서 하사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한다. 이 연합은 가장 구체적이고 실재적이어서 모든 구원 은혜가 이
Ⅰ. 서 론
인간은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혼자서 독백을 하거나 아니면 침묵할 때조차도 엄밀하게 따지자면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말은 전달의 수단이며, 표현의 도구이고, 수용의 매체이며 이해의 방법이다. 그것은 비록 언어의 형식으로 표현되지 않을 지라도 우리의 사고활동이 말과
“역사는 종말론적 기능을 가졌다” 이 문장은 에른스트 케제만에게서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지상적 예수에 해당된다고 본다. 또한 그는 이것을 “케리그마의 테두리 안에서” 명확하게 해석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른스트 푹스가 강조했던 것 같이 케제만도 케리그마에서 역사적 예수에게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