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임금이야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홍대용이라는 인물은 낯설다. 국사 시간에 조선후기 실학을 다룰 때 잠깐 언급되면서 의산문답 등의 주요 저술만 몇 권 소개되는 정도이다. 당대 최고의 셀럽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이 서연을 통해 만났다. 장차 임금이 될 세
가졌으며 이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위의 글은 연암 박지원이 홍대용을 위하여 쓴 묘지명이다. 위의 내용만 보아도 홍대용의 업적과,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
권력 지향적인 조선의 유학자 사회에서 저렇게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한 ‘홍대용’은 과연 누구 일까?
1. 홍대용의 생애
조선시대의 실학자. 과학사상가. 호는 담헌, 홍지.
홍대용은 조선 영조 7년 신해 1731년 봄,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에서 뒷날 목사 벼슬에 오른 아버지 홍력과 청풍 김씨 사이에 첫아들로 태어난 그는 미호 김원행을 스승으로 하여 성리학을 배웠으며, 1765년 계부 홍억의 연경
홍대용은 북경에서 돌아온 뒤 북경의 필담과 왕복 편지를 정리하여 <건정동 회우록> 3권을 만들고 <해동시선> 4권을 완성한다. 37세가 되었을 때 서울로 이사를 와서 이덕무, 박제가 등 북학파를 이루게 된 이들과 자주 만난다. 43세가 되었을 때 그의 철학과 학문을 경주한 주해수용과 의산문답을 지었다.
홍대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들으면서 애초의 보고서 주제였던 한국의 전통 천문학과는 다소 다르게 조선후기의 우주과학사에서 실학이 차지하는 영향, 더욱 자세히 말하면 한국 우주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실학자 홍대용이 끼치는 영향을 엿보려고 이와 같은 주제를 선택했다.
박세당이나
시대를 앞선 과학자이자, 사상가인 홍대용
당시 조선의 상황을 비추어 볼 때 홍대용의 주장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같은 계열에 속해있는 북학파 안에서 조차도 획기적인 것이었으리라. 왜 홍대용의 주장이 획기적일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한번 알아보자.
실질적으로 삼국시대의 역법기록
실학의 성립과 전개
-유형원,이익,홍대용,박지원,박제가
실학의 성립과 전개
*실학의 이념적, 학문적 특성
1.비판적 정신
:종래의 권위적인 주자학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을 지향하여, 자유로운 학문탐구의 기풍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기성의 폐쇄적인 권위나 폐습화한 사회의 구조적 모
홍대용도 실학개념의 완성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제일 먼저 ‘실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기의 학문을 설명하고 자기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무릇 사회에 유익한 자연과학과 기술 및 농업, 군사, 역법, 음악 등의 학문을 모두 실학이라고 보았다. 주칠성, 『조선시
'조천(朝天)'이라 부르던 것을 청나라 때에는 북경을 연경(燕京)이라 불렀으므로 '연행'으로 바꾼 것으로 그 말뜻에 이미 대청의식이 담겨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홍대용은 청나라에 대해서 긍정적 인식을 나타낸다.오랑캐라 해서 배척부터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군자의 마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인 물
충북 청주출생 영조7년(1731년) - 정조7년(1783년), 53세
본관 - 남양, 자 - 덕보, 호 - 담헌
조부 - 대사간 용조, 부 - 목사 역
당시 노론파 의 중심 김원행 에게 주자학을 배움
1777년 사헌부감찰 과 1778년 태안 현감, 1780년 영천군수역임
활 동
대표적인 북학파 선구자로 집안은 서인의 노론파에 속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