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우주관 실학자 홍대용

 1  조선후기의 우주관 실학자 홍대용-1
 2  조선후기의 우주관 실학자 홍대용-2
 3  조선후기의 우주관 실학자 홍대용-3
 4  조선후기의 우주관 실학자 홍대용-4
 5  조선후기의 우주관 실학자 홍대용-5
 6  조선후기의 우주관 실학자 홍대용-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조선후기의 우주관 실학자 홍대용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들어가며
실학은 조선 후기의 주자학 일관이었던 시각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실제성 추구, 고증 등의 학문 방법론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한 마디로 근대 과학으로의 접근 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업시간에 조선의 우주관에 관련된 내용과 더불어 홍대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들으면서 애초의 보고서 주제였던 한국의 전통 천문학과는 다소 다르게 조선후기의 우주과학사에서 실학이 차지하는 영향, 더욱 자세히 말하면 한국 우주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실학자 홍대용이 끼치는 영향을 엿보려고 이와 같은 주제를 선택했다.
박세당이나 홍대용과 같은 인물을 통해서 실학은 주자학의 이론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 이론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정약용을 거쳐 최한기에 이르러서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은 한역 서학서를 통해서 유입된 서양의 과학적 성과물들이었다. 특히 서양 역법을 도입하려는 조선 정부의 끈질긴 노력과 맞물리면서 서양의 자연 과학적 성과는 조선 후기의 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흡수되었다. 서양 역법의 수용으로 인해 서양 과학의 우수성은 이미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정받은 셈이었으므로, 현실에 쓸모 있는 학문을 지향하는 실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역법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과학적 성과는 마땅히 흡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의 역법이 전제하고 있는 우주관은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과 상충되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상충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그 시대의 학자들에게 부과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실학적 학문관
우선 실학이 발생한 배경을 보면, 조선 후기 당시의 제도 개혁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농민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양반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고, 삼강과 오륜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현실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실학자와 실학을 낳게 하였다.
실학은 무너져 가는 조선 후기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한 사상체계였다. 실학은 당시의 상황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으나 그들의 주장은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실학자들은 대체로 일생을 학문에만 힘써 왔고, 그들의 정책을 정책에 반영할 입장에 있지 못하였다. 또한, 실학은 일정한 한계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우선, 실학은 그 내부에 근대 지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것이 점차 발전하기는 하였지만 성리학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실학은 또한 백성들의 이익과 입장을 많이 고려하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양반의 입장에서 연구됨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사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중 북학파 실학자들이 서양 과학에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학자가 홍대용이다. 홍대용은 혼천의(渾天儀), 후종(候鐘), 혼상(渾象), 측관의(測觀儀), 구고의(勾股儀) 등을 갖춘 일종의 사설 천문대인 용수각(龍水閣)을 설치하여 연구를 했을 정도로 천문 관측에 관심이 많았다. 또 『수리정온(數理精蘊)』과 수학서를 참고해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했을 만큼 수학에 조예가 있었다.
그는 북경에 갔을 때 세 차례에 걸쳐 흠천감(欽天監)의 할러슈타인, 고가이슬 등 서양 성직자들을 만나서 서학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이 있다. 류포문답(劉鮑問答)에는 “지금 서양의 법은 산수를 근본으로 하고 기구를 도구로 하여 만물을 헤아리고 만상을 살핀다. 천하의 멀고 가까움, 높고 깊음, 크고 작음, 가볍고 무거움을 모두 눈 앞에 모아 손바닥 위에서 가리키는 것과 같으니, 한나라나 당나라에도 없었던 것이라고 해도 망언이 아니다”라고 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반정균, 엄성 등 중국 학자들을 만나서도 “논천(論天), 역법(曆法)에 있어서는 서양의 법이 고원하여 전에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천주학은 반대하지만 과학만큼은 뛰어나다는 걸 인정한다."라고 하였다.
서양 과학에 대한 홍대용의 높은 관심은 그의 실학적 학문 경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홍대용의 실학적 학문관은 우선 당시 유학자들의 학문 태도를 비판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기존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 가한 비판의 요지는 기존의 학문, 즉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경전의 해석에만 매달리는 예학(禮學)이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이 현실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적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역법, 산수, 재정, 국방과 같이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쓸모가 있는 경제지학(經濟之學)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우주관과 서양 우주설의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