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
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新韓民報)》의 주필로 내
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金炳魯) · 전영택(田榮澤) · 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2) 인간관
(1) 자유에 근거한 주체적 인간
도산은 자유로운 개인을 강조한다. “자유가 없으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 안창호, “불쌍한 우리 한인은 희락이 없오.” 도산기념사업회(編),『安島山全書 中 : 言論?資料 篇』(서울: 汎洋社 出版部, 1990), p.78
는 말은 인간의 본질을 명확하게 설파
五山學校 1907년 이승훈(李昇薰)이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오산리(五山里)에 창립한 민족
운동 인재양성기관. 10년 일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교육취지를 기독교정신으로 바꾸었지
만, 그 성격은 사관학교·훈련원·정치학교·인문중학교·특수모범자양성소 등을 겸한 학교였다.
그리하여 소정의 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