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두
인물 소개
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유학자·양명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몽주(夢周)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이상익(李商翼)에게 수학하였다. 몇 차례 과거시험
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배경]
1905년 을사조약 체격 후 헤이그 특사 파견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李商在), 이준(李儁) 등등)이 옥중에서 집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동휘(李東輝)를 비롯한 청년지사들이 외세에 맞서고자 교회로 찾아오면서 그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의 운동은 개화개혁운동에서 국권회복운동항일민족운동으로 변화하였다.
李商在)가 사장, 신석우가 부사장, 김동성(金東成)이 발행 겸 편집인, 그리고 이사진에 안재홍(安在鴻) 백관수(白寬洙) 이상협(李相協) 등이 취임하여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표어 아래 경영과 제작에 혁신을 단행하였다. 그 뒤 신석우 안재홍 유진태(兪鎭泰) 조만식(曺晩植) 등이 사장을 맡았으나,
1. 교회와 충군애국의 민족정신
1.1. 충군애국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함. ≒충애(忠愛)
의 교회
한국교회의 충군 애국적 민족정신은 1896년에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민비시해(閔妃弑害)나 춘생문(春生門) 사건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민족정신이 대담한 조직력으로 구현되고 있었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