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1  신민회-1
 2  신민회-2
 3  신민회-3
 4  신민회-4
 5  신민회-5
 6  신민회-6
 7  신민회-7
 8  신민회-8
 9  신민회-9
 10  신민회-10
 11  신민회-11
 12  신민회-12
 13  신민회-1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신민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신민회(新民會)-
제 목 | 신민회
내 용 | 신민회 기관지 《소년》창간호, 1908년 11월
1907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전국적인 규모로서 국권을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배경]
1905년 을사조약 체격 후 헤이그 특사 파견을 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일제의 한국 침탈행위가 날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해가자 이에 대항하고 국민역량을 한데 모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뜻에서 1907년 4월 초 이동녕, 안창호, 등 수 십 명의 발기에 의하여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창설.
1907년 2월 국권회복을 목표로 조직된 비밀결사. 일제가 1907년을 전후하여 보안법·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계몽운동은 노골적인 친일활동을 제외하고는 반일적인 합법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계몽 운동가들이 1907년 2월 비밀리에 조직한 것이 신민회이다. 계몽운동가 윤치호와 안창호가 각각 회장과 부회장을 맡고, 국권회복을 목표로 식산흥업과 교육진흥)을 통한 실력양성을 지향하였다.
[구상과 발기]
신민회 창립의 구상과 발기는 안창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안창호·이강·임준기(林俊基) 등은 1906년 말∼1907년 초의 연휴 기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남쪽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안창호가 생각해 낸 대한 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대한 신민회 취지서〉와 〈대한신민회 통용 장정〉을 초안하였다.
그들은 이 결사의 목적에 비추어 미주에서 이 단체를 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본국에서 이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본국에 파견할 대표로 안창호를 뽑았다. 안창호는 1907년 1월 20일경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동경을 거쳐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귀국 후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즉각 창립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결국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 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