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量寺)에 가서 학문을 닦았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36년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몽고
(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無量寺, 현 충남 부여군 의산면)로 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59세(성종 14년)였으며 무량사에는 그의 부도(浮圖)가 남아 있다. 그는 유교와 불교에 걸치는 학자로서 사상서 저술은 「매월당집」의 문고(文稿)에 수록되어 있으며 불교관계 저술로는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묘법연화경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으며, 1481년(성종 12년)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1493년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설총 그리고 일연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일연은 아홉 살 나던 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광주 무등산 밑 무량사(無量寺)로 공부를 하러 간다. 경상도 경산에서 전라도 광주까지 그 먼 길을 걸어야 했던 어떤 이유를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때는 굳이 승려가 되겠다는 뜻은 없었던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