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11년)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하여,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Ⅰ. 시작하면서
사실 우리는 한국의 고전문학을 대함에 있어 일종의 통념과 더불어 고전적인 배움의 자세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춘향전이나 심청전, 홍길동전과 같은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 작품들이 지금에도 어필할 수 있는 선조님들의 재미난 감수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흥
금오신화(金鰲新話)’란 작품이 있다. ‘금오신화’는 한국 고소설의 출발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민중 사이에서 구전되던 설화, 고려의 패관문학, 가전 등의 서사적 전통 위에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비록 한문으로 지어졌고,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였다고는 하지만,
금오산실을 복책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시습은 30세부터 37세까지 금오산실에 은거하 면서 구우의 ‘전등신화’를 탐독하고, ‘金鰲新話’를 지었을 것이다.
③ 금오기 (金鰲期) : 31~36세
김시습은 31세 되는 세조 11년(1465) 봄에 짐을 꾸려 경주로 내려가서 경주 남산 금오산 금 오산실을 복책하고
대군에게 붙잡혀 내불당에 머물면서(29세 때, 세조 9년) 간경도감의 연화경 번역의 교정 일을 보기도 했지만,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곧 금강산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후 예종에 이어 등극한 성종은 학문을 좋아하여 학자를 널리 구했으며 선정에 힘썼다. 매월당은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하여 치의을 벗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