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개화파들의 계획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청의 세력을 너무 무시하였다. 그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대는 약1500명으로 추산되고 서울에 있었던 일본군은 고작 12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통계에도 불구하고 개화파들은 소수의 일본군에게 의지한 채 정변
한계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서양과 일본 등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조선에서는 이에 맞서 ‘응전’하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과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그것이다. 전자는 위
개화파의 입지 및 정치적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 황에서 개화파가 1884년 시도한 정치적 변혁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겨울 김옥균, 박영효, 홍 영식 등의 개화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여 세운 우정국의 낙성식 연회를 이용하여 정치적 변혁을 단행하였다.
즉, 그들은 수구파
Ⅰ. 갑신정변
1. 개화파와 갑신정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중국의 양명학, 훈고고증학 등 한학의 도입과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식이 대두되어 성리학은 조선 전통사회를 이끌어온 지배이념으로서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경제적 피폐와 관료의 극심한 횡포에 따른 민생고 문제에 대한 반
갑신정변 회고록 p96~97
->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사상적인 차이가 분명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급진개화파가 완전한 친일인지는 심히 생각해봐야하는 부분이지만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국가의 개혁을 꿈꾸었음을 예상할 수 있고, “폐부의 신하”라는 표현의 온건개화파는 청에 의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