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었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하여졌으며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요람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근을 꾀하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근을 꾀하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민심수습을 대출척, 당쟁의 본거지 정리, 국가재정의 질서확립, 경제 개혁과 행정개혁 등으로 세도정치의 폐해를
1. 대원군의 삶과 정치
1820(순조 20)∼1898(광무 2).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이며 영조의 현손으로 남연군 이구의 아들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이다. 헌종 9년(1843)에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 천장 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 도총관 등 한직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은 김옥균이 보고 느꼈던 조선의 현실은 이렇듯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상에 의한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관직에 나오기 전부터 접하여 알고 있던 선진 외국의 모습과 개혁 사상은 이즈음 더욱 확고한
1>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대립
1868년 (戊辰 고종5) 윤4월에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 1868 - 1880)이 태어났다. 궁인 이씨는 살결이 희고 키가 훤칠한 미인이었는데 완화군을 낳고 영보당이라는 당호를 얻었다. 이 첫 왕자가 영보당의 미모와 고종의 후덕함이 조화된 결함 없는 용모를 가졌기에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