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을 벌여나갔다는 것이다. 또 민권과 국권에 대한 언급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여 근대적 정치사상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해왔다. 또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개화파의 계급적 입장이 지주제의 옹호 유지이며, 이들이 지주적 입장에서 위로부터의 자본주의화를 의도하였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개혁자에 의한 것이 아닌 잔반에 의해 지도됨으로써, 보민사상과 만민평등 사상을 제도적으로 수락하게 하지를 못하고, 민중의 에너지를 개화 저지와 왜적 소멸에만 투입한 것이 동학혁명의 한계점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회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던 신분 계층의 붕괴 현상을 표면화 시
. 그 가운데 한국역사연구회가 다년간에 걸쳐 근대사연구의 신진 기예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동원하여 편찬한『1894년농민전쟁』1˜5(역사비평사, 1988˜1995)는 농민전쟁의 배경?전개?귀결을 경제?정치?사상 등의 제분야에 걸쳐 종합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성공적인 대기획물이다. 이 기획에 참가한
개혁하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먼저 개화라고 하는 용어의 의미는 물적 개화로서의 ‘개물(開物)’과 인적 교화로서의 ‘화민(化民)’을 결합한 뜻이다. 여기서, ‘개물’이란 생업의 근대화 특히 ‘부국강병(富國强兵)’이며 ‘화민’이란 계몽과 교육에 의한 인간의 의식과 지식의 근대화를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촌사회의 모순은 봉건적인 지주 전호제의 모순에 제국주의적 모순이 부가된 형태로 민란의 시대보다 더욱 격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침탈에 따른 농촌사회 구성의 변화는 조선에서의 근대를 향한 변혁주체세력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침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