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정착한 이후, 475년 웅진으로 천도할 때까지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다. 그 후 고구려의 남진정책(南進政策)으로 475년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어 나제 연합군이 재탈환하게 되는 551년까지 이 지역은 고구려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에 대한 이견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2.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
<이유>
1) 원한
-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구려는 예부터 싸움이 잦았다.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이 황해도지역으로 북진하였다. 경기만을 장악하고 황해중부 해상권을 획득해 일본열도와 한반도 중부이남, 그리고 중국으
근구수왕대에 들어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때 백제는 강력한 경쟁국가였던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을 유린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의 전과를 쌓아 패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듯했다. 그러나 백제의 전성은 곧바로 내리막길로 나타니고 있어, 그 기반이 매우 취약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구려는 군대를 보내 북위군과 대치하면서 북연왕 풍흥과 다수의 주민은 이끌고 회군하자 북위는 풍홍의 송환을 요구를 거절하여 위기상황에 이르렀으나 유연의 침입을 경계한 북위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군사적 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는 427년 평양천도 이후 남진정책을 본격적으
고구려가 돌궐(突厥)과 비밀히 내통하면서 조공(朝貢)조차 바치지 않자, “고구려왕이 친조(親朝)의 예를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때맞추어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시달려 온 백제와 신라는, 번갈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토벌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