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개관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고대국가를 이룩한 고구려는 문헌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7년 지금 중국 동북지방의 환인인 졸본에서 건국하였다고 하며, 건국 직후부터 주변 세력을 병합하여 영역을 확장하여 갔다. 그 후 고구려는 집안의 국내성과 평양으로 차례로 도읍을 옮겼다. 국내성 시기의 고
고구려토기와 철제품이 출토되었으나 조사단은 이 유적을 고구려 군사유적이 아닌 백제의 고분으로 추정하였다. 이후 구의동유적은 거의 20여 년 동안 백제유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후 성내에서는 백제토기와는 이질적인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보고자는 그것이 구의동유적 출토유물과 함께 고
고구려사 연구가 이처럼 부진하게 된 데에는 먼저 사료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본래 문헌사료가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남북분단과 대립으로 인하여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을 직접 접하기 어렵게 되어 연구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만주 벌판이 현재 북한이 아닌 중국에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가 내이군(奈已郡 : 지금의 영주시)․급벌산군(及伐山郡 : 지금의 풍기읍)이 되었다가 신라에 병합되어 내이군․급벌산군은 그대로 유지되고, 기목진(基木鎭 : 지금의 풍기읍)이 새로 설치되었다.
500년(소지마립간 22) 왕이 이 곳에 행차해 벽화(碧花)와의 전설을 남기기도
고구려시대의 생활유적이 다수 발견.
- 성 밖의 동서쪽에 해자를 만들어 궁성을 보호.
- 성 안에는 안학궁의 흔적이 잘 남아있음.
라)청암동토성
- 위치 :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동. 평양성과 안학궁지 사이에 해당.
- 출토 : 고구려시대의 금동관, 연화문와당을 비롯한 다량의 유물들
☞일부 학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