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해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모리 테루토모(毛利輝元) 등과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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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치의 개혁도 순조롭지 못한 채 외국과의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막부의 토대가 흔들리고 멸망의 날이 눈앞에 다가오게 되었다.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패한 패장(敗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결사(決死)의 자세로 싸운 위대한 장수로 남아있다. 그러나, 신립은 위대한 장수가 아니며 우리가 그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미화가 된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한 후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고니시는 경남 泗川에 주둔 중인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 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명을 군선 약 700여 척에 태워 부산포에 상륙시켰다.
일본군 선발대 대장인 小西行長(고니시유키나가)은 14일 부산성을 공격하였다. 부산진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15일 東萊城을 약 2만의 군대로 포위 공격하였다. 부산성과 동래성 모두 군관민이 일본군에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었다.
유키나가, 타카야마 우콘, 쿠로다 요시타카 등)과 친분과 신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일본에서의 기독교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Drummond, Richard Henry.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Japan, p.77.
그러던 그가 갑자기 기리시탄에 대한 태도가 급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