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독교] 기리시탄 시대의 박해(1587-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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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 기독교] 기리시탄 시대의 박해(1587-1643)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기리시탄 시대의 박해(1587-1643)
1.들어가며
예수회 선교사인 하비에르가 일본에 오면서 시작된 일본의 기리시탄 시대는 부흥하고 확장되고 많은 신도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즉 박해의 시기를 맡게 된다. 이러한 박해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에도막부를 맡게 되면서 점차 심한 박해를 받게 되어 1643년 이후가 되면 선교사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등이 기독교에 대한 태도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여기에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이 글에서는 기리시탄 시대의 박해 상황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바테렌 추방령’을 발령한 때부터 일본 땅에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선교사나 기독교인이 거의 없어지게 되는 1643년경까지로 한정하여 살펴 볼 것이다. 또한 박해의 내용과 과정 그리고 그 역사적인 의의 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전국시대에서 막부체제로 vs 기리시탄 교회와의 관계
16세기 전국시대의 기리시탄 교회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종교적인 세력들에 지속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기독교 공동체의 운명은(존재는) 지역무사 영주들의 지지와 보호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었다. 기리시탄 교회는 지역 세력이 좋아하고 받아들인 지역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다. 이들의 종교적인 행동이 받아들여 지지 않은 곳에서는 기독교인들은 의심과, 중상모략과 때로 박해의 대상이었다. John Whitney Hall,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 4. p. 360.
예수회 선교사들은 첫 번째 전국 통일의 주역인 오다 노부나가(1534-1582)와 좋은 관계 확립하였다.아주치(Azuchi), 교토(京都) 등에서 발리나뇨와 같은 선교사들이 환영을 받았다.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하면서 개별적 지방 군사 세력들에 의해 나뉘어 졌다가 전국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따라서 이제 기독교는 헤게모니 잡은 한 세력만 신경 쓰면 되었다. 처음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장군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큐슈의 몇몇 다이묘오들이 새로운 종교 받아들이고 영내 백성도 따르게 하였다. 쿄토는 기독교 활동의 제 2 중심지가 된다. 큐우슈우의 세 다이묘오(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 오토모 요시시게)가 특히 기독교를 지원하였다.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는 1570년 나가사키 항을 개항하고 예수회 교회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1580년에는 나가사키 도시행정을 선교사에게 넘겨줌으로서 기리시탄 독립의 가장 명백한 상징이 되었다. 1582년 아리마 하루노부, 오오토모 요시시게와 오무라 스미타다는 네 명의 일본인 기독교도로 구성된 사절단을 포르투갈 범선에 태워 로마교황청으로 파견하였고 이들은 1590년경에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지배자들의 외래종교 용인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통일과 통합의 물결이 전국에 퍼져나가자 서양의 무역상인과 선교사 환영하는 개방적 상황 사라진다. 1587년 이후 이러한 탄압이 점점 가시화되고 1612년 토쿠가와 정권은 확고한 결의로 기리시탄의 탄압에 나선다. 그러나 외국무역은 앞으로 수십 년 간 더 권장된다. 그러나 큐우슈우의 다이묘오들이 외국과의 접촉으로 부유해지는 것을 경계한 새로 수립된 중앙권력이 이를 금지함에 따라 무역도 무거운 제약을 받게 됨. 1640년에 이르면 일본은 쇄국과 기독교 탄압이란 엄격한 정책을 채택한다.
3.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87-1643)
히데요시의 기리시탄에 대한 태도가 처음부터 반기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흐름을 이어서 처음에는 선교사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고 기독교 다이묘오들(코니시 유키나가, 타카야마 우콘, 쿠로다 요시타카 등)과 친분과 신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일본에서의 기독교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Drummond, Richard Henry.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Japan, p.77.
그러던 그가 갑자기 기리시탄에 대한 태도가 급변하게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가 발령한 바테렌 칙령을 통해 알 수 있다. 바테렌(伴天連) 천주교 사게를 가리키는 말로 이후 현재의 신부(神父)를 뜻한다. 본래 라틴어 Pater에서 온 포르투갈 어 padre를 일본인들이 ‘빠데레’라고 발음하였으며 ‘波天連’ 또는 ‘伴天連’으로 음차표기를 하였다. 이후 한자의 음을 그대로 읽어 ‘바테렌’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선교에 종사했던 수도사(修道士,irmao)에 대해서는 이를 ‘이르만’이라고 부르고 ‘伊留滿’이라고 음차 표기를 했다.
칙령은 1587년 7월 24일에 치구젠 하코싸키 현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437-98)가 발령한 기독교선교와 남만무역에 관한 금제문서이다. 바테렌 칙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 1항. 일본은 신국(神國,Nation of the Gods)이다. 그리스도교국으로부터 사악한 법(邪法) 이 전파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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