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을 금수와 같은 국가라 칭하며 거란을 멀리했으며 친송 정책을 펼쳤다. 거란과 송은 북경 이북에서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연운16주 지역의 문제를 둘러싸고 적대 관계였다. 그리하여 거란은 송을 치기 위해 우선 고려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993년 고려에 1차 침입을 시도하였다.
2. 본론
* 1차
외교비사 - 서희는 거란 80만 대군을 어떻게 물리쳤나
잔혹하고 포악하게 사람을 죽이는 민족, 거란이 8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건국 이후 고려에 닥친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강동 6주와 선물까지 받아낸 서희의 담판. 거란은 서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내막에는 고려,
거란군은 자진 철군하였다. 더욱이 고구려의 옛 땅이었던 강동 6주까지 되돌려 받았다.
―서희 장군의 협상 성공요인
① 정확한 거란의 침공의중 파악
서희 장군의 거란과의 담판 성공은 상대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이를 뛰어난 협상 전략으로 활용한데 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의도
고려의 대외관계와 압록강 하구의 중요성
936년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고 960년 중국에서는 송이 5대10국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을 통일한 송은 당시 북방을 통일한 거란과의 대립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송은 거란과의 고량하 전투에서 패전하여 거란이 점유하고 있던 연운 16주
거란 내침 시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 후 거란군을 철수시킴
994년 평장사로 지내며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축출, 장흥진, 곽주 등을 축성
995년 강동 6주를 축성하여 지금의 평북 일대 국토를 완전히 회복
996~997년 태보내사령 제수
998년 신병으로 개국사에서 임종
- 이몽전 사신으로 보내 제 1차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