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귀족만이 역사적으로 귀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고려 귀족사회는 한국 역사발전의 하나의 시대적 단계였다고 주장하였다. 막스베버의 가산관료제설을 고려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가산관료제 하에서는 관리가 노예와 하인과 같은 비자유 관리이고
고려의 초기의 정치제도는 후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태봉의 제도가 대부분이었으나 성종 대 당나라와 송나라의 관제를 모방하고, 고려의 실정에 맞게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으로 운영하였다. 이 밖에도 중추원, 삼사, 어사대, 고려만의 독자적인 정치기구인 도병마사와 식
Ⅰ. 高麗의 軍事組織
고려는 918년 弓裔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開敞하여 935년 신라의 歸附를 끝으로 완전한 통일국가를 건설하기까지 군사적으로 많은 충돌이 발생하였다. 後百濟와 끊임없는 전쟁을 하였고, 북방세력과 군사적인 충돌이 잦았던 만큼 軍事組織에 커다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고려 초
시대까지는 이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에는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 백제의 싸울아비(불확실)가 존재함) 그러나 고려가 창건되고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유고사상이 자리잡으면서 무신 성향을 버리고 유학을 배우는 문신귀족으로 변화하며 점차 숭문천무를 숭상한빠졌다가 무신의 난이라는
고려시대의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이루어져 군사제도 그 자체에 대한 연구결과는 많이 발표되어 왔다. 그 중 지금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군사제도에 대한 성격 부여이다.
그동안 고려전기 군역제의 성격을 군반씨족제로 이해하는 것이 거의 통설처럼 되어왔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