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중국의 풍악과 같지 않으면 예전대로 향악을 쓰는 것만 못하옵니다.”
하였다.
▶▶중국의 음악을 쓰고자 하여 향악을 다 버리는 것은 단연코 불가하다는 세종의 의견에 대해서 맹사성이 동의하며 향악을 버리는 것을 불가하다고 한 점에서 그의 향악을 존중하였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세종대왕이 한국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왕조와는 달리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는 당연히 음악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음악이 필수불가결한 요
세종의 휘(諱)는 도요, 자(字)는 원정(元正)으로 1497년(태조 6) 4월 10일(양력 5월 15일)에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에서 이방원(李芳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전주이다.
아버지 이방원(1367-1422)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의 향처(鄕妻)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다섯 째 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세종대왕을 꼽는다. 대표적으로 훈민정음 창제와 측우기, 해시계 등의 많은 발명품을 남겼으며, 대한민국 만원권 화폐의 모델이기도 한 그의 훌륭한 업적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