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희)의 정치
1874년 고종친정 이후 정치적 격변기마다 국왕권의 약화나 견제를 담은 綸音이 나왔다. 임오군란 직후, 갑신정변 직후, 원세개의 고종폐위시도 직후, 그리고 갑오개혁 직후에 그러했다. 개항기 정치상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나온 것이다. 윤음은 대체로 국왕의 이름을 빌린
1. 고종황제(1852~1919.1.21 재위 : 1863~1907)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세력 다툼에 밀려 이렇다 할 힘을 쓰지 못했다. 이후 일본과 청, 서구 열강이 세력 다툼을 벌이면서 조선으로 진출해오자, 조선 내에서는 근대화의 방향과 수위를 놓고 극심하게 대립했고 이 와중에 고
친정으로 돌아가게 된 다. 이때 녀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의 집에서 돈을 지불한 후에 다시 신 랑집으로 돌아와 살게 된다. 이는 로동을 담당하게 될 녀자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 골장제(옥저)
시체를 림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이 모두 썩게 했다가, 그 후에 뼈만 추
종통을 잇게 하였다.
1.2 정조 즉위 전 시대적 상황
정조가 즉위 할 때의 정국의 불안한 상황은 표면상이라도 균형을 유지했던 붕당이 무너진 숙종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숙종 → 경종 → 영조 → (사도세자) → 정조
숙종은 자신의 두 여자를 매개로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기용하며
정치를 이끌어 간 것이 이 둘로 대표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명성황후는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했고 흥선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행함으로써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 둘은 첨예한 권력 싸움을 벌였다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이에 본 조는 과연 이러한 기존의 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