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외획으로 국가재정의 근간인 지세까지 장악해나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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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종(이희)의 정치
1874년 고종친정 이후 정치적 격변기마다 국왕권의 약화나 견제를 담은 綸音이 나왔다. 임오군란 직후, 갑신정변 직후, 원세개의 고종폐위시도 직후, 그리고 갑오개혁 직후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이에 고종은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근대화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로 인하여 조선도 만국공법 질서에 편입하고 근대화를 추구하고자 하였지만, 열강의 개입과 국내적 분열로 인하여 이러한 시도는 좌절을 겪게 되었다. 국내적
대한제국 내에서도 친러파와 친일파, 그리고 중립파로 나뉘어 각기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권이 유린되고 국토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최우선 과제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국권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1899년 8월 17일 대한국국제를 반포하여 국
서론
대한제국기 황제 중심 권력구조의 성립은 대내적으로 민권운동세력을 제압한 결과이면서 동시에 외세가 가져온 대외적 위기의식의 산물이였다. 광무정권은 왕권실추를 경험한 고종의 주권강화의지를 구심점으로 황제의 측근친위세력들이 정권의 핵심을 장악한 가운데, 독립협회 및 망명개화파
고종조 초기 좌의정을 지내며 경제정책을 시행한 박규수의 정책은 1)화폐량과 상품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으로의 복귀에 중점이 두어졌으며 정부의 불간섭 즉 가격동결과 시장에 대한 가격안정을 정부의 개입에 의한 해결보다는 자유방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