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씨(公孫氏) 세력이 자리를 잡으면서, 고구려의 중국 군현에 대한 공세도 일단 주춤거리게 되었다. 더욱이 공손씨 세력은 낙랑군에도 세력을 뻗쳐 새로이 대방군을 설치하여 이 지역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그 후 중원세력이 재편되면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위(魏), 진(晋)에 의해 통합되자, 그 과정에
공손씨(公孫氏)는 낙랑군의 남부에 위치한 옛 진번 땅에 대방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목적은 토착 한예세력이 강성하여 낙랑군이 통제하지 못하자 그것을 강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렇듯 낙랑군은 토착세력의 저항을 받아 약화되고 있었다. 마침내 313년, 고구려에 의하여 낙랑군이, 이어 백제에 의
연대만으로는 위나라의 공격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요동의 군벌에 가담시켰다. 그들 중 일부는 탈출하여 고구려로 넘어갔다. 공손씨에게 배신당한 오나라가 고구려와 손을 잡으려 했지만, 고구려 역시 위나라와 비밀 회담을 비밀리에 주고받는 등 양다리 작전을 계속했다.
공손씨(公孫氏)의 후손인데 후일 서방족인 서릉 지방의 누저에게 장가를 들어 데릴 사위로 들어간 뒤로부터는 서방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동방족인 황제 헌원을 한족의 시조로 내세우는 이유는 서방족에 가담하여 끝내는 동방족울 흡수, 동화시켜 한족이 형성될 수 있는 바탕을 마
공손씨(公孫氏) 세력을 멸망시킨 조위(曹魏)는 고구려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고구려는 신흥 강국인 위나라와의 우호를 위하여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화친을 위하여 보낸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0年條.
또한 위나라의 공손연(公孫淵) 토벌에